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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벤트의 이면 / 2008.05.05.북핵리포트 2007-2012 2015. 8. 15. 19:18
신임 김숙 6자회담 수석대표가 워싱턴을 다녀갔다. 그리고 여기 저기서 긍정적인 메시지들이 당국자나 소식통을 인용해 흘러나왔다.
주된 팩트는 6자회담이 곧 재개될 거라는 얘기, 그리고 북한이 테러지원국 리스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방북했던 성김 과장에게 가능한 최대한의 협조를 해줬다는 것 등이었다. 부시대통령은 워싱턴의 한 행사장에서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했다. 또 '힐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더라'는 보도도 있었다.
RFA는 성김 과장이 다시 방북한다는 얘기가 워싱턴 정가에 돌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마도 거의 완성된 신고서를 검토하기 위해서 그가 평양에 다시 갈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그 뒤에 북한이 중국에 신고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려나 보다. 이변이 없다면 6자회담도 5월 말쯤엔 열릴 수 있을 것 같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미 '상주대표부'를 거론하기까지 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는 서울의 외신기자 간담회에서 시리아-북한 핵협력문제에 대한 백악관의 발표가 "오랫동안 준비된 것"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발표 전후에 벌어졌던 일들이 마치 잘 짜여진 각본을 보는 것 같았다는 지난 번 칼럼이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었나 보다. 정면돌파를 위한 '이벤트' 였던 셈.
비둘기파들은 고무됐는지 모르지만 반대편, 워싱턴 매파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4월30일, 워싱턴에선 북한관련 뉴스거리가 여럿 있었는데 2시반, 4시반 2시간의 시차를 두고 AEI(미국기업연구소)와 존스홉킨스대에서 각각 열렸던 2개의 세미나는 극명하게 그 대비를 보여줬다.
우선 AEI, 북한문제 전문가는 아니지만 비확산쪽 전공인 캐롤린 레디(carolyn Leddy)는 몹시 화난 표정으로 발표를 했다. 그녀는 "그래도 부시 대통령이 확산문제 만큼은 포기하지 않을거라고 믿었는데... 이제 나는 나의 믿음을 잃어버렸다."라고 그녀는 선언했다. 캐롤린 보다는 자주 세미나에 등장하는 데이비드 애셔(David Asher)는 당장이라도 지난 2006년 북한에 대해 핵 실험을 했을 때 발동됐던 안보리 결의 1718을 강도높게 적용하고 금융제재를 강화하는 등 채찍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클린턴과는 다른 정책으로 가자'는 1기 부시정부의 대북 강경책이 결국은 북한의 플루토늄 보유량을 늘리고 핵 실험까지 강행하게 한 것 아니냐는 민주당쪽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냐"고 그에게 질문을 했다. 그는 몹시 신경질이 난 듯 했다.
"사실 난 북한문제에 대해 아무 상관 없어요(I don't care.). 하지만 내가 10여년간 북한관련 일을 했고, 그 사람들 잘 아는데... 그런 식으로 협상할 상대가 아니라니까.."
그런데, 요즘 매파 사람들이 싫어할 만한 또 다른 이벤트가 준비되고 있는 듯 하다.
워싱턴 포스트의 글렌케슬러 기자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테러지원국에서 해제된 뒤 24시간 안에 냉각탑을 폭파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한다. 냉각탑은 위성사진으로 원자로의 가동 여부를 가장 분명히 판단할 수 있는 아주 '상징적'인 구조물이다. 북한이 30-50킬로그람의 플루토늄을 재처리했다고 미국 정보당국이 추정하는 근거도 많은 부분 바로 이 냉각탑에서 수증기가 나오는지 안나오는지 찍은 위성사진에 의존하고 있다.
이제는 영국 대사로 자리를 옮긴 천영우 전 6자회담 수석대표가 언젠가 사석에서 이런 얘기를 한 일이 있다. "6자회담이 꼼짝을 않고 굴러가질 않는다. 마치 테니스장의 바닥을 평탄하게 만드는 거대한 시멘트 바퀴가 세워져 있는 것과 같지. 처음엔 움직이기 힘들지.. 그렇지만 일단 움직이기만 하면 그걸 더 굴리기는 쉬운 법이야." 2.13 합의가 만들어지기 전에 했던 얘기다.
6자회담만 잘 된다면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에 진전이 만들어질 수 있는 동력이 된다면 그것이 이벤트가 됐건, 쇼가 됐건 내 입장에선 상관 없다고 생각한다. 애셔의 말 대로 "I don't care."다. 그러나 만약 그 이벤트의 의미가 너무 과도하게 부풀려진다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 만이라도 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6자는 재시동을 위한(Jump start) 2.13 합의, 그리고 2단계와 3단계를 위한 10.3 합의를 만들어낸 바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불능화'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 세부사항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예방주사를 놓기 위해 일부러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실수였는지 헤커(Siegfried S. Hecker)박사는 현재 영변에서 진행되고 있는 불능화 진행상황을 슬라이드를 통해 대상 시설(연료봉 생산공장, 5메가와트 원자로, 재처리시설)별로 자세하게 보여줬다.
그 자료에 따르면 원자로의 열을 식히는 냉각탑은 이미 내부의 주요 기계설비가 모두 치워진 상태다. 그러니까 남아있는 건 고깔처럼 생긴 콘크리트 껍데기 뿐이고 이걸 폭파시킨다는 건 그 '상징성'외에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헤커박사의 슬라이드에서 내가 본 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는 불능화의 의미가 북한이나 미국 양측으로부터 상당히 강조되고 있는데 반해 '기대'했던 것 보다는 내실이 없다는 점이었다.
우선 연료봉 제거작업이 더디지만 북측의 협조아래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는데, 해커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연료봉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북-미간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 한 번 원자로에 넣었던 연료봉은 다시 원자로에 넣을 수 없다. 그러나 한 번도 넣지 않았던 연료봉은 원자로에 넣을 수 있다. )
두 번째, 역시 가장 중요한 건 5메가와트 원자로인데, 이 원자로의 핵심은 (냉각계통 빼고) 거의 하나도 손을 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0.3 합의에서 연료봉 제어장치 (Control rod drive mechanisms)를 제거하기로 했지만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해커박사의 슬라이드에 나와있다.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는 아마 중국이 신고서를 접수했다는 소식이 들려 올 때쯤 절차가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열릴 6자회담에선 2단계(불능화,신고)에서 3단계(핵폐기,검증)로 건너가기 위한 요소들이 논의돼야 할 텐데,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을 보면 넘어야 할 산이 한 두개가 아닐 것 같다. 요컨대, '계획됐던 불능화의 완료'라는 문제 마저도 얕볼만한 이슈가 아니라는 얘기다.
1994년 제네바 합의 마지막 단략은 이렇게 시작된다. "경수로사업의 상당 부분이 완료될 때, 그러나 주요 핵심 부품의 인도 이전에 북한은 북한내 모든 핵 물질에 관한 최초보고서의 정확성과 안전성을 검증하는 것과 관련하여 (중략) 안전조치협정을 완전히 이행한다." 14년전의 이 합의문은 추가로 2가지 과제를 생각하게 한다. 북한은 언제 경수로를 언급할 것인가. 3단계 이행의 핵심인 검증은 누가 맡게 될 것인가? IAEA는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입버릇처럼 우리측 6자회담 담당자들은 말해왔다. 앞으로 가야 할 길에 비하면 'BDA'문제나 '신고'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이제 정말 어려운 길을 가야 하는 시점인데 부시 대통령의 임기는 얼마 남지 않았고 돌파를 위한 몇가지 '이벤트'에도 지극히 현실적인 난관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북한은 그리고 미국은 과연 어디까지 가려는 것일까?
작성일 : 20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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