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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산책 / 2007.02.10.북핵리포트 2007-2012 2015. 8. 15. 12:30
본래 중국 황제들이 쉬어가는 행궁으로 사용됐다는 댜오위타이(釣魚臺)는 약 8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특히 명나라 영락제, 그리고 청나라 건륭황제가 이곳을 애호했다고 한다. ‘물고기 잡는 곳’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금나라 장종(章宗) 황제가 이곳에서 낚시를 즐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외교부 산하 기업형태로 운영되고 있으며, 중국을 방문한 국가 정상과 수행원의 숙소로 사용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아주 넓은 영빈관인 셈이다.
우리는 이곳을 표현할 때 대개 ‘조어대’라는 한자 발음을 써서 읽는데, 북한은 그 뜻을 따서 ‘낚시터’라고 부른다. 어느 표현이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중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자기가 생각 없이 이 표현의 차이와 관련해서 가볍게 얘기를 꺼냈다가 아주 난처한 상황을 맞은 일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중국 측 통역은 대개 한국이 아니라 북한에서 교육받는 사람이 많은데, 한 번은 주중한국대사관 관계자가 통역이 필요한 한-중 외교관들의 만남이 끝난 뒤 통역에게 “댜오위타이를 낚시터라고 해서 좀 이상하게 들렸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엔 이것이 북한에서 공식 용어로 쓰이는 것을 몰랐던 것. 그런데 이 중국 측 통역이 “왜 그걸 문제 삼느냐”고 아주 진지하고 의미심장하게 되물었다고 한다. 그동안 ‘낚시터’라고 죽 통역을 해오던 말인데 “통역을 엉망으로 한 게 아니냐”는 식으로 문제 삼았으니 그 사람도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던 것.
통역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리가 한국말로 통역실력을 판단하자면 외교장관 회담 같은 고위급 접촉에 등장하는 통역의 실력은 생각보다 높지 않은 편이다. 특히 미국 측 인사와 함께 오는 통역은 좀 심하다 싶을 정도. 오죽했으면 영어실력이 일천한 내가 통역을 거쳐 나오는 얘기가 너무 이해가 안돼서 동시통역 장치를 떼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을까.
그런데 북미국 관계자에게 물어봤더니 그런 일이 벌어지는 이면에는 참으로 간단치 않은 이유가 깔려 있었다. 미국사람들은 통역을 선택할 때 통역의 기술 수준이 높은지 아닌지를 주 평가 잣대로 삼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 국적을 가진 사람, 미국이란 국가에 충성심이 있는 사람, 미국의 이해관계에 저 밑바닥부터 부합하는 사람을 원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우리 측 관계자들과 접촉이 많은 주한미국 대사관에선 여러 차례 통역을 교체하자는 건의를 했지만 먹혀들지 않았다고 했다. 뭐랄까, “알아듣는 건 너희들 몫이니 우리가 세운 통역이 잘 하던 못하던 간에 알아서 해라.” 미국의 행동 저 밑바닥에는 이런 속내가 깔려 있는 게 아닌가 해서 그 얘기를 들으면서 괜히 기분이 나빴다.
송민순 장관은 두 번째 날 오후 주중 대사관에서 북경 특파원들과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대통령이 순방외교를 떠나면 동포간담회 자리를 꼭 갖듯이 장관이 외국을 방문하게 되면 그 나라에 나와 있는 우리나라 특파원들과 간담회 자리를 갖는 게 상례다.
주중 대사관 건물은 작년 10월에 완공됐다고 했다. 유리가 많이 쓰인 건물. 전체적으로 직선이지만 정방형을 피한 설계가 현대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건물이었다. 또 무엇보다 공간을 사무실로 꽉 채우지 않고 여유 있게 마당을 배치한 것도 눈에 띄었다. 당시 한겨울이라서 볼 수 없었지만 마당 오른편에 자갈이 깔린 공간이 있었는데, 그 공간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시설이 갖춰져 있다고 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수박을 쪼개놓은 듯, 한 지붕 아래 사무실 공간과 강당이 분리돼 있었다.
대사관이란 곳에 들어가 본 것이 처음인지라 출장을 함께 온 관리에게 부탁해 안내를 해달라고 했다. 현지 공관 직원이 손을 뻗어 이곳은.. 저곳은... 어떤 곳이라고 설명을 해주긴 했지만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보안을 위해 본국 파견 직원과 현지 직원의 사무실을 완전히 분리한 첫 건물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대사의 방은 3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송민순 장관이 도착하자 직원들이 도열했다. 박수를 치고 사진을 찍고 하는 의전이 진행된 뒤 난 주중 한국대사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명함을 주고받는 가운데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주중 한국대사관이 아니라 ‘주화 한국대사관’으로 표기가 돼 있었던 것. 왜 화(華)일까?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국인들의 생각, 세계관을 반영하는 글자가 아닌가?
한자로 이름 석 자를 쓰는 나라는 사실 우리나라와 중국이 유일하다시피 하다. 명함에 씌어있는 ‘華’라는 글자 하나를 보면서 나는 얼마 전 한 외교부 관리로부터 들은 얘기를 떠올렸다. 그는 언젠가 서구의 한 도시에서 다른 나라 외교 관리들과 만나 명함을 건넨 일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쪽에서 돌아온 말은 "Are You Chinese?"였다고. 한국인인줄 알았는데 중국인이었냐고 확인하는 물음이었다고 한다. 우리 외교관은 상당히 충격을 받고 명함 뒷면에 다시는 한자를 쓰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어쨌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초면에 명함을 받아들고 화부터 낼 수는 없는 일.
간담회에서 나온 내용들은 듣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들이었고 6자회담 전망과 관련해 “2월 10일 이전”이라는 새로운 단서만 추가되는 정도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송민순 장관이 댜오위타이로 나와 연합뉴스 조준형 기자를 초대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송 장관이 조어대를 좀 더 자세히 구경하고 싶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댜오위타이는 모두 17개 건물로 구성돼 있는데, 외국 정상은 통상 18호 건물에 투숙한다. 우리가 6자회담 소식을 들으면서 TV에서 자주 보게 되는 곳은 ‘방비원(芳菲苑)’이란 곳인데, 지난 1992년 한중 수교 합의가 이뤄졌던 장소이며, 평소에는 방중 외국원수가 주최하는 연회장으로 주로 사용된다.
아무래도 ‘영빈관’ 역할을 하는 곳인 만큼, 숙박시설의 경우 특급호텔 시설이 갖춰져 있다고 들었는데 막상 들어가서 보니 그리 화려하고 우아한 느낌을 주는 시설은 아니었다. 현대적인 집기들이 놓여 있었지만 어쩐지 건물과 조화롭지 못한 느낌이었다.
장관이 머무는 방엔 넓은 거실도 딸려 있었다. 40평대 아파트의 거실정도 넓이랄까? 다만 천장은 보통 아파트보다는 훨씬 높았다. 방 한편엔 커다란 PDP TV가 매달려 있었는데 상표를 보니 ‘삼성’이었다. 장난스런 생각인지는 몰라도, 일본 외상이 중국을 방문하면 소니 PDP TV가 결려있는 방을 안내하는지 갑자기 궁금해 졌다.
송 장관으로부터 와인 한 잔을 받아놓긴 했는데, 그 술잔을 기울이며 즐길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장관과 2명의 기자. 쉽게 연출되지 않는 좋은 기회인만큼 집요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6자회담 전망, 그리고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는 이른 바 ‘초기 조치’를 북한이 이행하게 될 것인지 등. 그러나 장관은 뭔가 ‘영양가 있는’ 얘기를 꺼낼 듯 말 듯 하면서도 특유의 비유법으로 질문을 피해갔다. 그러길 20여 분 마침내 뭔가 기사화 될 만한 얘기를 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송 장관은 ‘실수했다’고 느꼈는지 ‘오프’를 요청했다.
“이런 자리에서 하는 얘기가 다 오프지 뭐. 이런 거 지금 기사 쓰면 되겠어요?" 매우 맥이 빠지는 순간이었다.
이것도 ‘비밀’에 속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외교부 브리핑엔 4가지 종류가 있다. 먼저 . 이건 일반인들도 어느 정도 익숙한 개념일 텐데, 취재원이 보도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취재에 응하는 것을 말한다. 당연히 그 말을 인용할 수도 없고, 기사 방향과 관련해서도 반영을 할 수가 없다.
다음은 . 이건 외국에는 잘 없다고 하는데, 외교부 출입 기자들은 하나의 룰로 지키고 있다. 직접 인용은 할 수 없지만, 마치 기자의 추측인 듯 브리핑의 내용을 기사에 녹여서 쓸 수 있는 경우다.
세 번째로 는 취재원의 정확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고위 당국자’ ‘정부 당국자’ 이런 식으로 말을 인용해 쓰는 것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이건 아무런 제한 없이 취재원의 이름을 밝히고 인용할 수 있는 취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외교부 기자들은 ‘말 못할’ 얘기들을 많이 가슴에 품고 살 수밖에 없는데 송 장관의 얘기도 어떤 내용인지 전할 수가 없다.
<송 장관과의 대화>를 마치고, 우리는 숙소 건물을 나와서 조어대에서 가벼운 산책을 하기로 했다. 그 때가 벌써 밤 11시가 넘은 시각. 중국 측에서 대접한다고 내놓은 숙소지만 조어대는 결코 편한 곳은 아니란 게 우리 측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었다.
일단 외부세계와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데다 ‘외교 복합 단지’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관에서 운영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식사에 대한 선택권이랄까 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다고 했다. 또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혹시 도청장치가 돼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해 볼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취재진의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회담 같은 걸 진행할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라고 느끼는 듯 했다. 조어대 밖의 경우 6자회담 관련 인사들이 어느 곳으로 향하건 취재진이 그 차량을 추적하기 때문에 구름떼 같은 기자들을 만날 수밖에 없는데 일단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는 조어대에 들어가면 그런 문제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6자회담의 경우, 조어대 안에서 대부분의 일정이 진행이 됐고 9.19 공동성명의 산파 역할을 했던 송민순 장관도 조어대에 얽힌 에피소드, 기억들이 많은 것 같았다.
지난 2005년 9.19 공동성명은 그야말로 난산 끝에 나온 옥동자다. 물론 그 선언이 이행계획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나 6자회담의 논제를 집약하고 트랙을 벗어날 수 없게 붙잡아주는 일종의 가이드라인 역할을 한다는 면에 있어서 누구나 그 효용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조어대에는 물고기 잡는 곳이라는 원래 의미에 걸맞게 인공호수가 몇 개 있는데, 송민순 장관은 산책을 하다가 호수 가운데에 만들어져 있는 전각 하나를 가리켰다.
“2005년 당시 최종 합의문 초안을 두고 주거니 받거니 6개 나라 수석대표들이 공방을 벌이고 있는 상황. 나는 크리스 힐 미국측 수석대표와 호수 가운데 있는 정자에 앉아 다리를 걷고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눴었지. 차석 대표보고 좀 논의를 진전시켜보라고 해놓고 말이지. 그 땐 정말 신선놀음이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
조명을 밝힌 조어대는 스산한 느낌마저 들던 낮 보다는 덜 차가와 보였다. 10 분여가 지났을까.. 장관은 돌아가지고 했다. 그리고 우린 조어대를 나왔다. 조어대 밖 숙소로 돌아와 보니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어차피 북핵문제란 것이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닌 이상, 또 내가 외교부를 맡고 있는 이상 앞으로 물고기 잡는 곳 댜오위타이, 혹은 조어대와는 수 없이 많이 조우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번만큼, 조어대의 깊숙한 공간들에 오랫동안 머물 기회가 앞으로도 쉽게 오지 않을 것이라는 측면에서라도 이번 송민순 장관 동행취재는 성공적이라고 자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약간 과장하자면, 한반도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그야말로 외교의 최일선 무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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