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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힐의 유명세 / 2007.2.4
    북핵리포트 2007-2012 2015. 8. 15. 16:21

    지난 2월4일, 크리스 힐 미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와 천영우 한반도 평화교섭 본부장이 롯데호텔에서 만찬 회동을 가졌다.  전날 이미 인천공항에서 기자들과 질의 응답 시간을 갖은 터였지만 평소 그의 행태로 보면 항상 한국 당국자를 만난 뒤에야 중요한 얘기를 풀어놓기 때문에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취재 포인트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크리스 힐은 그날 오전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던 NHK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베를린 접촉에서 ‘모진 겨울을 보내기 어렵다’고 하면서 중유를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고 밝혔다고 NHK가 기사를 썼기 때문에, 취재진들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번 6자회담에서 북한이 일정 수준의 핵동결 조치를 취할 거란 건 상당히 기정사실화 된 측면이 있고, 그렇다면 그 반대급부로 나머지 5개 나라가 무엇을 내놓을 것인가에 오히려 관심이 집중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은 북핵 협상과 관련해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 미국은 지난 1994년 Agreed Fraimwork, 일명 <제네바 합의>로 불리는 북-미 양자협상을 통해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 가동중단 등 핵 동결(freeze)의 대가로 연간 50만톤의 중유를 제공해주기로 했고, 실제 그렇게 했었다. 그런데 북한의 고농축우라늄계획(HEU)의 존재가 알려지는 2002년 이른바 <제 2차 핵위기>를 거치면서 그 제네바 합의가 결과적으론 별다른 소득 없이 무위로 끝나고 만 것. 

    2차 핵위기는 클린턴 행정부 당시에 있었던 일이고, 부시행정부는 그래서 “중유”나 “경수로” 같은 용어를 등장시키는 걸 극도로 꺼려왔던 게 사실이다. 더구나 북한은 핵 실험을 강행하고 그로 인해 UN 안보리결의 1718을 통해 제재를 받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힐이 나타나는 곳에 취재진이 몰리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의 반듯한 외모, 그리고 결코 취재진을 물리치지 않는 매너 때문일 거다. 그런데 그날은 좀 양상이 달랐다. 만찬회동이 벌어진 장소가 일본 관광객이 많은 롯데호텔이어서 그랬던 것인지 일본인 관광객들이 만찬회동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취재진의 무리에 하나 둘 합세하기 시작한 것.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일본인 관광객들은 저마다 카메라나 휴대폰을 꺼내들고 “몰려드는” 순준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젊은 여성들이 중심이었는데 40~50대 중년의로 범위가 넓어졌다. 흡사 방송국 앞, 스타를 기다리는 10대들의 대형 비슷한 것이 되고 만 것이다. 

    도대체 취재진들이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알고 모여드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 취재진이 배용준 같은 한류스타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후지TV같은 일본 방송사의 한국 특파원에게 ‘우리가 기다리는 사람이 한류스타가 아니고, 크리스 힐 미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다. 또 그래서 뭐 재미있는 구경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를 전해달라고 했는데, 그 기자는 주저주저 했다. 그 사람들 일이지 굳이 우리가 간섭할 필요가 있겠느냔 얘기였다. 

    저녁 7시10분경부터 기다렸는데 1시간이 넘어서도 힐은 나타나지 않았다. 급기야 한 일본 여성은 다리가 아팠는지 호텔 로비 대리석 바닥에 털썩 않아 졸기까지 하는 추태를 보였다.

    힐이 모습을 드러낸 뒤에야 몰려있던 일본인 군중들은 ‘아~’ 이런 소리를 내며 실망스럽다는 표현을 했다. 그래도 기다린 게 아깝다는 듯이 사진 한 장씩은 찍고 물러났다. 

    어떤 사람들은 “힐이 자신을 기다리는 기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언제나 그렇듯 힐과 천영우 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이 함께 만나면 기자들은 크리스 힐에게만 집중이 됐다. 힐은 “NHK 스스로 그런 말을 지어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북한이 중유제공을 요청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면서 거듭된 기자들의 질문에 분명히 답했다. 

    워낙 초점이 분명했던 자리여서 그랬는지 거의 매번 20분 이상 진행되던 인터뷰는 10여분 만에 끝났다. 흡사 ‘플래시 몹’처럼 힐을 둘러싸고 모였던 취재진들이 모두 흩어진 뒤, 난 ‘한류스타를 기대하고 카메라를 꺼내 몰려들었던 일본 관광객들과 힐을 둘러싸고 마이크를 들이댔던 우리들과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생각을 했다.

    지난해 12월, 6자회담 5차 2단계 회의 때 미국 대표단 숙소가 있었던 세인트 레지스 호텔에서 북경주재 외신기자들과 맥주 한잔을 마신 적이 있다. 역시 힐을 기다리다가 시간이 너무 지연돼서 잠깐 짬을 낸 거였다. 

    그 때 한 미국인 기자는 이렇게 말했었다. “북핵문제는 사실 일본과 한국, 중국이 해결하면 그만인 문제 아니냐. 왜 이 문제를 미국이 신경을 쓰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경제적인 지원을 분담하는 문제에 있어서 미국이 손을 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그런데 왜 북핵문제는, 그리고 그걸 해결하려는 6자회담의 구도는 남-북이 중심이 아니라 북-미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일까? 북한은 왜 이 문제를 어떻게든 북-미 양자적인 채널을 통해 풀려고 시도하는 것일까?

    유명한 한반도 전문가 오버도퍼의 저서 <Two Koreas>에 잘 나와 있지만 남-북의 분단은 냉전의 산물이다. 그런데 당시 냉전의 한 축인 러이사는 더 이상 ‘축’의 역할을 하지 않고 있는데 반해 미국은 유일한 슈퍼파워,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리고 냉전시대 - 과거의 시간 속에 박제처럼 멈춰버린 북한은 스스로의 존재의 틀을 지켜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역시 흘러간 과거의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다. 그리고 흔히 ‘벼랑 끝 전술’ 이라고 부정적인 ‘수사’로 표현되지만 북한은 갖은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한 손에 겨우 쥘 무엇을 가지고 슈퍼파워 미국과 위험한 게임을 벌이는 것이다.       

    그래서, 6자회담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항상 슬프고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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