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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DA 증후군 / 2007.04.29.
    북핵리포트 2007-2012 2015. 8. 15. 16:33

    4월의 햇살이 새로 돋은 잎새들을 한없이 투명한 연두색으로 비추던 어느 날, 점심식사를 마치고 잠깐 꿀맛 같은 오수에 빠져든 A기자는 갑자기 뻔쩍 눈을 뜨며 깨어났다. “5월15일에 6자회담을 하기로 했다고?” 비몽사몽간에 그는 허둥대고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저녁뉴스 리포트부터 빨리 해줘야지..’ 

    “선배 정신차려요.” 옆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동료가 얼굴 가득 미소를 띄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꿈이다. 여전히 6자회담은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자금 2천5백만달러 처리문제에 발목이 잡혀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있다.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엊그제 일어났던 사건이다. 개인차는 어느 정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쯤 되면 도렴동 외교부청사 기자실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어떠한지 미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가히 “BDA 증후군”이라 부를 만하다. 

    곧 풀린다던 문제가 6자회담 6차 1단계 회의를 끝내 망쳐놓더니 2.13 합의에서 만들어진 핵시설 폐쇄시한까지 훌쩍 넘기고도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2~3일 내” “몇일만 더 기다리면..” “이번 주 중에는..” 이런 말들이 한국과 미국, 중국 등 국경을 가리지 않고 당국자들의 입을 통해 여러 차례 나왔었다. 적절한 비유는 아니지만, 이제 정말 늑대가 나타나야 할 시간이 된 것도 같은데, 여전히 양들은 초원 위에서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팔베개를 베고 누워 잠을 청할 상황은 아니다. 

     북한자금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북한은 여러 차례 공언 했듯이 IAEA 사찰관을 초청하고 영변 원자로를 폐쇄하는 절차에 들어갈 것이고, 한국에선 약속대로 중유 5만톤을 보내게 될 것이며, 6자회담은 물론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의 방북, 이어 6자 장관회담까지 흡사 핵분열 같은 연쇄적인 반응이 일어나게 돼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BDA 문제가 풀렸다는 소식은 정규방송중에 속보 자막을 띄워야 할 만큼 비중 있는 뉴스기 때문에 취재기자 입장에선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입장이라는 얘기다. 

    북핵문제 취재는 기본적으로 ‘탐정놀이’의 성격을 띄게 돼 있다. 외교 사안은 기타 정부부처의 정책결정 과정과는 달리, 국가간의 상호작용 - 교섭을 거친 뒤 합의를 이뤄내는 절차를 거치게 된다. 합의문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 외교 당국자들이 갖고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완성된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부분적인 밑그림에 불과하다. 

    그래서 당국자들은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는 그 밑그림을 기자들에게 속 시원하게 밝힐 수 없고 기껏해야 몇 가지 단서들, 이게 정물화가 될 것인지 풍경화가 될 것인지 큰 구도와 관련해서만 찔끔찔끔 힌트를 줄 뿐이다. 

    검찰의 기자들을 상대로 한 수사브리핑도 ‘선문답(禪問答)’같은 형식에 있어선 외교부 브리핑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검찰은 수사의 주도권을 쥐는 주체이기 때문에 방향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있지만, 우리 외교부 당국자들은 판단이 옳은 것인지 여부를 스스로도 100% 확신할 수 없다.  

    필연적으로 기자들은 탐정이 돼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취재를 통해 얻게 된 정보의 조각들, 그리고 미국에서, 중국에서, 일본에서 외신을 통해 전해지는 소식들, 그리고 북한이 KCNA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혹은 조총련계 조선신보를 빌어 대외적으로 밝히는 입장들을 테이블 위에 늘어놓고 시시각각 조각 맞춰보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보의 조각들이 일관된 하나의 큰 그림으로 구성된다는 판단이 들면 기사를 쓴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퍼즐을 맞추듯 테이블에 여러 가지 조각 정보들을 늘어놓을 때, 아귀가 잘 맞지 않는 파편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럴 때 각 정보들마다 신뢰도의 경중을 부여해 취사선택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경우 완성된 그림이 전혀 엉뚱한 것이 되고 말 때도 있다. 부분적인 진실은 분명히 담고 있지만 영 딴 다리를 긁는 오보는 그래서 나온다.    

    이런 어려움들이 가장 크게 증폭돼 나타나는 게 바로 BDA 문제 취재다. 

    우선, 건너기 힘든 강이 자리 잡고 있으니 그건 이 문제가 본질적으로 금융기술적인 분야에 속한다는 점이다. 계좌의 동결과 동결 해제, 금융기관의 파산이나 제 3자 인수, 예금자 보호, 은행사이의 Correspondent Account 관계, 계좌의 명의변경 문제, 돈세탁이나 계좌세탁의 문제 등 전문적인 용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한다. 무시하고 건너뛰고도 싶은 마음이 없지 않지만, 이런 개념들을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에 따라 ‘조각그림’에 대한 판단이 달라질 수 있고, 큰 그림을 그르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구도 자체의 원초적인 복잡성이다. 언뜻 단순화해서 생각하면 BDA문제는 북한과 미국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이 자국의 애국법 311조를 적용해 지난 2005년 9월 마카오의 규모가 작은 은행인 방코델타아시아가 ‘돈세탁 우려기관’이라고 지정해서 시작된 일이긴 하다. 그러나 출발은 그랬을지 몰라도 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BDA의 계좌를 동결한 조치는 단위가 큰 도박자금이 움직이는 마카오 금융시장에 충격을 줬고, 마카오는 자치정부이긴 하지만 중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따라서 최소한 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선 미국정부는 물론 마카오 금융당국, 중국 금융당국도 모두 개입될 수밖에 없다. 플레이어(player)가 많아진다는 건 그만큼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이고 당연히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해법을 찾는 게 더 어려워진다는 걸 뜻한다. 

    여기에, 2천5백만달러 가운데 700만달러는 북한으로부터 인수한 돈이라고 주장하는 매카스킬이란 인물이 조연으로 등장하고, 북한이 원하는 대로 BDA에 묶인 자금을 다른 곳으로 보내기 위해선 불법자금이란 꼬리표가 붙은 2천5백만달러를 받아줄 제3, 제4의 금융기관이 등장해야 한다. 

    이 문제는 어렵다. 그래서 계륵(鷄肋)과 같다. 

    MBC를 포함해 언론사들은, 이 BDA에 관한 기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심하는 듯하다. 무시하자니 한반도의 장래가 걸린 중요한 문제 같긴 한데, 그렇다고 기사를 심자니 일반 독자들이 과연 공감을 할 기사인지 의심스럽기 때문. 여기에다 “곧 될 거다.”라고 기사를 쓴 게 최소한 북-미 베를린회동부터인데, 아직도 기자들이 “해결 임박”같은 제목으로 기사를 송고하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탓. 

    지난 25일에 있었던 송민순장관의 정례 브리핑 이후로 당국자들은 BDA해법에 있어 “마지막 단계(last stage)”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아마도 빅터 차 백악관 보좌관과 북한 김명길 유엔대사의 뉴욕접촉 결과가 23일 워싱턴을 방문한 천영우 한반도 평화교섭 본부장과 임성남 북핵기획단장의 보고를 통해 전달됐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수요일 청와대 관계자, 목요일 정부 당국자로부터의 백그라운드 브리핑이 있었고 송민순 장관의 발언 내용과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금요일,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본 조총련계 조선신보는 <BDA가 풀리지 않는 요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서 미국 재부부가 BDA에 대해 지난 3.14일 내린 조치를 언급하며, ‘BDA가 달러결제를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거기에 들어있는 북한자금을 송금하는 것이 어렵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추정키론 북한은 BDA에서 돈을 인출해서 일시적으로 해외 달러결제가 가능한 마카오의 다른 은행으로 송금한 뒤 거기서 제 3국의 북한 계좌로 달러이체를 하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국제사회에서 확실하게 꼬리표가 붙은 북한 돈을 받아줄 제 3국 금융기관을 찾은 건 - 그게 사실이라면 - 분명히 당국자들이 “마지막 단계”라고 부를 만한 큰 진전이 아닐 수 없다.    

     우다웨이 부부장은 28일 베이징에서 가토 고이치 일본 자민당 전 간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지금 마카오 정부가 동결된 (북한) 자산 문제를 처리하는 쪽으로 해결이 추진되고 있다”면서 “해결 전망이 밝으며, 좋은 뉴스가 곧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27일 연합뉴스 정주호 기자는 BDA관계자를 접촉한 뒤  “아직까지 북한이 접촉을 해오거나 자금인출 및 이체신청을 하지도 않았다”면서 “우리 은행에 대한 미국측 제재가 이미 발효중이어서 북한 자금이체가 쉽지 않을 전망”이라고 전했다. 그야말로 모순된 조각그림들이다. 

    오늘은 4월의 마지막 일요일. 창밖으로는 매력적인 봄의 색채가 바람에 흔들리며 내 마음을 흩트리고 있지만, BDA증후군에 감염된 나는 여느 때처럼 침침한 외교부 기자실 한 구석에서 테이블 위에 조각그림들을 펼쳐놓고 한창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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