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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핵문제 약사 (1) 1차 핵위기부터 클린턴 방북 좌절까지
    2018 북미정상회담 2018. 6. 5. 22:30




    원자로와 핵폭탄 

     

       원자로나 핵폭탄은 원자핵에 중성자를 충돌시킬 때 나오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폭탄이 그 에너지를 일시에 분출하도록 한다면 원자로는 그 분열 과정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해 ‘천천히 터지게’하는 시설이다. 


        이렇게 천천히 터지게 조절하는 방식(전문용어로 ‘감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경수로는 보통의 물로, 중수로는 중수로, 흑연감속로는 흑연으로 원자로의 반응 속도를 조절한다. 북한의 핵개발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북한은 1959년 9월 구 소련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했다. 북한은 1955년 핵물리학 연구소 설치를 결정한데 이어 1956년에 소련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면서 30여명의 과학자를 파견했다. 1959년에는 중국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했다. 1962년엔 외국에서 돌아온 학자들을 주축으로 영변과 박천에 원자력 연구소를 설립했다.  <과학기술로 읽는 북한 핵>의 저자 이춘근에 따르면, 북한의 핵관련 기술인력은 6천명을 넘어섰고, 이 가운데 전문 연구인력은 3천명 정도인데 고급인력이 2백여명에 달한다. 


       1962년에는 함경남도 신포에 2메가와트 용량의 연구형 원자로(IRT-2000)를 짓기 시작한다. IRT-2000은 1965년에 완공됐다. 


        이어 북한은 소련의 기술을 들여와 경수로를 건설하기로 하고 1985년에 핵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해 평화적인 핵 이용을 할 것을 다짐했다. 셀리그 해리슨은 그의 책 <코리아 엔드게임>에서 1963년 북한이 소련에 핵무기 개발을 위한 지원을 했는데 소련은 이를 거절하는 대신, 국제적 감시아래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이들 원자로 외에 북한에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는 다른 원자로가 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다. 


        많은 학자들을 옛 소련으로 유학보냈던 북한은 1980년 7월, 자체 기술로 5메가와트 흑연감속로를 착공해서 1986년에 완공했고, 85년에는 용량이 더 큰 50메가와트 원자로와 200메가와트 원자로, 원자로에서 꺼낸 플루토늄의 순도를 높이는(재처리) 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을 착공했다. 


       영변 원자력연구단지의 핵심 시설에는 5메가와트 흑연감속로와 방사화학실험실(재처리시설), 연료봉 제조공장 등이 있다. 

       

        흑연감속로는 기름을 많이 먹는데 멀리 가지 못하는 자동차처럼 투입한 연료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에너지가 낮은(열효율20%) 원자로다. 또, 흑연이라는 감속재는 고온에서 방사선을 받으면 그 에너지를 저장하는 특성이 있어서 화재가 날 가능성도 크다. 반면 이 원자로는 일단 건설비용이 싸고 대단한 고급기술이 필요치 않은데다 핵무기의 원료로 사용될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생산하기가 용이하다.



    북한의 핵 개발 동기?  


        그렇다면 북한은 왜 핵을 개발하게 됐을까? 


        두 가지 동기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이른바 ‘핵 억지력’을 갖기 위한 것 셀리그 해리슨은 “핵무기와 미사일 운반체계를 개발하려는 북한의 노력은 한국전쟁 당시 논란이 됐던 핵무기 사용 위협과 뒤이어 30년 이상 남한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 핵무기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석탄이나 수력발전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전력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우선 북한은 미국이 핵무기로 공격하는게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같은 맥락에서 한.미의 팀스피리트 훈련을 현실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다는 게 여러 학자들의 견해다. 1975년 제임스 슐레진저(James R. Schulesinger) 국방장관은 성명을 통해 공개적으로 핵 무기가 남한에 배치돼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실제로 팀스피리트 훈련 작전 중에는 "공지전 전략(Airland Battle)"이란 것도 있었는데, 북한이 진격해오기 전에 이들을 궤멸시키고 병참지원을 막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셀리그 해리슨은 ’그 시나리오가 가장 고조된 시기는 1980년대 중반이었으며, 북한의 핵무기 개발 노력은 공지전 전략을 과시한 팀스피리트 훈련이 시행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북한은 그들이 느낀 이런 ‘실질적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스스로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억지력’을 갖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북한은 매장량이 풍부한 석탄, 그리고 수력발전을 이용해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싶어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70년대 중반에 원자로 3개가 가동되고 있던 한국을 부러워했다. 따라서 자체 설계한 영변 흑연감속로와는 별도로 1985년 모스크바를 설득해 소련의 최신 모델 원자로 가운데 하나인 경수로를 제공받기로 했다. 


     경수로는 흑연감속로와는 달리 무기급 플루토늄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북한의 NPT가입  


        소련은 경수로 제공의 대가로 NPT에 가입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래서 북한은 1985년 12월12일 NPT에 가입했다. 다시 말해 NPT가입은 후자, 즉 전력생산을 위한 경수로 도입을 위해 북한이 내린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던 것. 셀리그 해리슨은 이 대목에서 북한이 “자신들의 비밀스런 핵무기 개발 노력을 방해받지 않고도 이 조약에 서명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기록한다. 


        NPT는 간략히 말해서 핵을 가진 나라가 나머지 국가들에 대해 핵무기를 갖지 말라고 하는 조약이다. 1969년에 비준됐는데 ‘처음으로 만들어진 다자조약이자 가장 불평등한 조약’이라는 오명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조약에 가입한 비핵국가는 별도로 ‘핵 안전협정’에 가입해 핵물질의 이동과 보관, 재처리 과정에 대한 엄격한 사찰을 받아야 하지만 조약에 가입한 핵 보유국 (미국 옛 소련, 중국, 프랑스, 영국)은 핵 사찰을 받을 의무가 없다. 


     이렇게 불평등한 조약이 비준됐던 것은 무엇보다 5개 나라의 파워가 컸기 때문이고 이들에게 협조하지 않을 경우 북한의 사례에서 보듯 평화적인 핵 기술의 이전, 협력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IAEA와 안전조치 협정   


        NPT에 가입하면 18개월 내에 IAEA와 안전조치 협정을 맺어야 하는데 몇 가지 이유 때문에 협정을 맺는게 늦어졌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동향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인공위성을 통해 북한이 경수로 프로젝트와는 별도로 추진했던 영변의 흑연감속로 시설들을 위성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프랑스 상업위성 SPOT 2   


        마침내 1989년, 미국은 북한이 영변 5메가와트 원자로의 가동이 중단됐음을 파악했다.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려면 원자로를 세우고 연료봉을 꺼내서 재처리를 해야 하는데, 미국의 정보당국은 ‘북한을 그냥 놔뒀다가는 1992년쯤 부터는 원자폭탄을 생산할 수 있는 플루토늄 생산이 시작될 거’라는 판단을 했던 것. 그래서 옛 소련과 중국(1989.2)에 이 사실을 통보했고, 한국도 3달쯤 뒤에 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해 9월 주요 언론들은 프랑스의 상업위성 SPOT 2호가 촬영한 영변 핵시설 위성사진을 실었다.

     

        이렇게 해서 북한 핵문제가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됐다. 



    비핵화 공동선언 


        북한의 영변 등 지역의 위성사진에는 5메가와트 원자로 외에도 당시 추가로 건설중이던 50메가와트, 200메가와트 급 원자로와 핵 재처리 시설(방사화학실험실)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이 시설들이 완성되면 북한의 연간 플루토늄 생산량은 150킬로그람에 이르고, 이는 핵무기 30개를 매년 만들 수 있는 양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압력을 높여갔다. 1990년 3월 IAEA이사회는 북한의 전면 안전조치 협정 체결을 권고했다. 미국은 중국을 통해서도 압력을 가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북한은 여러차례 진행된 국제원자력기구와의 접촉에서 "핵보유국의 비핵국가에 대한 핵무기 사용 및 위협 금지, 한반도에서의 핵무기 완전 철수, 그리고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 등의 조건의 충족되면 IAEA의 요구사항을 수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돌파구는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미국과 옛 소련과의 군축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미국은 옛 소련과의 중거리 전술핵무기 폐기협정에 따라서 1991.9.27 전술핵무기를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미국은 당초 IAEA 전면안전조치 협정체결은 NPT가입에 따른 의무인 만큼 다른 요구와 연계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이 내세웠던 전제 가운데 하나가 해소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11월8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제안하고 12월31에는 북한이 이를 합의함으로써 한반도 안팎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이 대목에서 셀리그 해리슨은 북한관리들과 외교관들로부터 들은 얘기들을 근거로 1991년 12월 24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북한에서 강경파와 온건파의 논쟁이 뜨거웠다고 전한다.  


       강경파들은 "워싱턴, 도쿄, 서울이 자신들의 체계를 붕괴시키려고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들 적대세력으로부터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구상을 일축"한 반면에, 실용주의자들은 "그들을 시험해 보자"고 했다. 결국 이 논쟁은 "미국과의 협의가 실질적으로 진행된다면 핵 프로그램은 유예될 수 있을 것"이지만, "미국과의 협의가 반드시 이 프로그램을 중단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고 한다. 

     

        전문과 6개항으로 이뤄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정원식 국무총리와 북한의 연형묵 국무원 총리가 서명했는데, 이 공동선언에 따르면 남과 북은 (1항) 핵무기의 시험, 제조, 생산, 접수, 보유, 저장, 배비, 사용을 하지 않고 (2항) 핵에너지를 오직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하며, (3항) 핵재처리시설과 우라늄 농축시설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돼 있다. 2002년 2차 핵위기 때 북한의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이 ‘한반도 비핵화 선언’ 위반이라는 건 이 대목을 말한다. 


     또 (4항) 한반도의 비핵화를 검증하기 위하여 상대측이 선정하고 쌍방이 합의하는 대상들에 대하여 남북핵통제공동위원회가 규정하는 절차와 방법으로 사찰을 실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북한은 이듬해 1월30일, IAEA와 핵 안전협정을 서명했다.



    중대불일치 


        북한과 핵 안전협정을 맺은 IAEA는 1992년 5월26일부터 6월5일까지 1차 임시사찰 활동을 벌인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북한이 IAEA에 제출한 최초 보고서(initial report)와 IAEA의 사찰 결과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첫 번째 불일치는 생산된 플루토늄이 얼마냐에 대한 것이었다. 


        북한은 손상된 연료봉을 통해서 실험적으로 1989년에서 1990년 사이에 1 번 추출한 플루토늄 양이 90g이라고 주장했다. 셀리그 해리슨은 1992년 북한에 갔을 때 최종순 북한 원자력부 외사국장으로부터 추출한 플루토늄 양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IAEA는 임시사찰을 통해, 북한이 1989년, 1990년, 1991년 이렇게 세 차례에 걸쳐 사용후 핵연료에서 수킬로그람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불일치는 사찰대상이 되는 시설에 대한 문제였다. 북한이 제출한 최초보고서에 포함되지 않은 2개의 시설이 있었는데 북한은 이를 '군사시설'이라고 주장했다. IAEA는 그러나 이 시설이 사찰의 대상이 되는 재처리시설과 핵 폐기물 저장장소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문제는 국제적으로 2곳의 미신고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해야 한다는 쪽으로 방향이 잡혔다. 그러나 북한은 이것이 주권침해라면서 IAEA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긴장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중단됐었던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한다는 발표가 1993년 1월26일 나왔고, 29일에는 남북고위급회담 북측 대표단이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할 것을 발표했다. 이어 2월 25일에는 IAEA이사회가 특별사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북한은 1993년 3월12일 NPT탈퇴를 선언했다. 


    1993.3.18

     IAEA특별이사회, 대 북한 결의안 채택

    1993.4.1

     IAEA특별이사회, 북한의 안전조치협정 불이행의 유엔 안보리보고 결의 채택

    1993.4.8

     유엔 안보리, 북한 핵문제 관련 의장성명 채택

    1993.5.11

     유엔 안보리, 대북결의안 825호 채택

    1993.6.3

     박길연 주 유엔 대사, 유엔 제재조치시 ‘한국전쟁재발’ 발언 





    1차 핵위기 : 


    북한의 NPT 탈퇴 유보 


        1993년 6월12일은 북한이 예고했던 NPT탈퇴 예정일이었다. 그러나 그 직전인 11일 북한과 미국 사이에 극적인 타협이 이뤄졌다. 북.미는 '1단계 회담 공동 발표문'을 통해서 핵 불사용 불위협, 자주권 존중, 내정 불간섭, 한반도 평화통일지지 등의 원칙을 확인했다. 북한은 12일 NPT탈퇴를 유보했다. 북한은 1992년 1월30일 IAEA와 전면 안전조치 협정을 체결하고 IAEA사찰을 받았지만 IAEA가 북한의 핵 개발실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자 1993.3.12 평양 만수대 의사당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제 9기 7차 회의를 열어 NPT탈퇴를 결정했다. 북한의 탈퇴 효력은 같은 해 6.12에 발생하게 돼 있었지만 북한은 하루 전인 6.11 북미 제 1단계 회담 공동 발표문에서 NPT 탈퇴 효력을 정지시켰다.  6월14일에 한국은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발표했다.


        이어 2단계 회담의 성과로 7월19일에 북미 공동성명이 나왔다. 이후 1993년 7.19일  나온 북미 공동성명은 "북한이 IAEA와 핵 사찰에 대한 논의 의사를 피력하고, 북미 양측이 무기급 플루토늄 추출이 용이한 흑연감속로를 경수로로 대체하는 방안을 논의함으로써 북미 간 핵 협상이 큰 진전을 이루는 듯 했다." 


        이 성명에는 북한이 IAEA 핵 사찰에 대에, 미국은 흑연감속로를 경수로로 대체하는 방안에 대해 서로 논의하기로 돼 있다. 


        그러나 몇가지 문제로 인해 이 합의에도 불구하고 1993년 6월에서 1994년 초기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상황은 파도가 치듯 오르락 내리락 했다. 


        첫 번째 클린턴 정부는 행정부 내, 그리고 의회 강경파 목소리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당시 의회는 공화당이 다수석을 장악하고 있었다. 

     

       두 번째 IAEA와 북한은 사찰의 대상과 방법 등의 문제를 놓고 끊임없이 충돌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김영삼정부는 대북 강경노선을 취했는데 이로 인한 남-북 사이의 긴장이 북-미간 협상에 영향을 미쳤다. 1993년은 미국과 한국 모두 새로운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했던 해다. 이른바 문민정부의 김영삼 대통령은 대북정책에 있어서 강경기조로 일관했다. 반면 클린턴 행정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정확한 정책적인 방향이 확립돼 있지 않았고, 행정부 내에서는 CIA와 국방부, 그리고 의회에 포진하고 있던 강경파의 목소리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대목에서 한.미 정상회담이 중요한 문제를 발생시켰다고 해리슨은 지적한다. 미국 관리들과 한국의 외교부는 이른바 '일괄 타결식 접근 방법'에 대해 이미 교감을 한 상태였는데, 한국내 강경파의을  목소리에 경도된 김영삼 대통령은 정상회담 테이블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강한 접근을 주문했고, "클린턴은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에서 좀더 강경한 새 전제조건을 내세운다는 데 동의했다."는 것.   


       북미합의에 따라 1993년 8월 4일 IAEA사찰단이 북한을 방문했는데, 북한은 영변지역의 핵폐기시설에 대해 사찰을 거부했다. 이렇게 되자 1993년 9월 13일 미국 하원이 대북 무역.금융제재 결의안을 채택했고, IAEA는 10월1일 37차 총회를 통해서 핵안전협정의 완전한 이행을 촉구하는 대북 결의안을 채택했다.  


        1993년 11월 잠시 긴장이 완화되는 국면이 조성되는 듯 했지만 11월11일 북한 외교부의 강석주 제 1 부부장이 공식 담화를 통해 "핵 문제는 서로가 자신의 책임을 이행하는 일괄 타결방안에 근거한 합의에 도달할 때 순조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해리슨에 따르면, 토머스 하바드(Thomas Hubbard)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는 강석주와 뉴욕에서 예정에 없던 만남을 갖고, "일괄타결을 지향한다는 원칙을 클린턴 행정부가 수용할 것이란 방침을 전달했다." 


       김일성도  1994년 4월 19일 담화를 통해 "핵문제의 일괄 타결을 위한 제안이 현실화하고 경수로가 제공된다면" 영변의 재처리시설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밝히는 등 북한은 '일괄타결'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그런데 북한이 방사화학실험실에 대한 사찰을 거부하면서 다시 틀어져 사찰 공방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994년 1월 CIA와 국방정보국(DIA)은 북한이 12kg, 1~2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북한 핵 문제를 안전보장이사회로 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클린턴 정부내 협상파는 설 자리를 잃었다.



    ‘서울 불바다’발언   


        1994년 3월 19일에는 8차 남북실무접촉에서 이른바 '전쟁땐 서울 불바다 발언'(3.19)이 나오고, 3월21일에는 한미는 팀스피리트 훈련재개에 합의했으며, 이에 대해 북한은 NPT탈퇴를 강행할 거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계속 높아지던 긴장이 정점에 달한 건 북한이 94년 5월 폐 연료봉을 인출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북한은 안전성을 이유로 연료봉을 인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북한 말고는 이것이 무기급 플루토늄을 생산하기 위해 재처리 과정을 밟으려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또 IAEA는 이 과정에서 연료봉 추출과 봉인에 입회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료봉이 과거 핵활동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시료채취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북한은 '시료채취 요구는 북한과 IAEA간의 합의를 넘어선 요구'라고 반발했다. 


     여기에 더해 IAEA가 북한 핵을 사찰하는데 있어 해리슨의 표현에 따르면 "강압적"인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1993년과 94년 상반기까지는 긴장이 강화됐다가 느슨해졌다가 다시 강화되는 양상이 반복됐다.    



    북한, IAEA공식 탈퇴 선언   


        이렇게 되자 IAEA는 이 문제를 안보리에 보고한 데 이어, 1994년 6월10일 북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는 국제적 차원의 최초 제재 결의였으며 북한에 대한 일체의 핵관련 기술지원 중지, 북한에 대해 안전조치와 관련된 모든 정보와 장소에 대한 접근 제공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북한은 6월13일 IAEA 공식 탈퇴를 선언한다.



    안보리 대북제재결의  


        상황이 악화되자 미국은 2가지 접근법을 병행했다. 하나는 안전보장이사회를 통한 대북제재였고, 다른 하나는 군사적 조치였다.  우선 대북제재를 보면, 미국은 6월초 대북 제재 결의안 초안을 작성해 'P5'라고 부르는 상임이사국과 한국, 일본등과 논의에 들어갔다. 


         이 초안은 1단계로 무기 및 부품 수출 금지 및 국제개발 원조를 중단시키고 2단계로 대북 송금 동결하며, 3단계로는 완전한 무역금지를 조치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더 강도높은 조치를 요구했고 중국과 러시아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두 번째로 군사적 조치를 보면 미국은 이미 1994년 1월 초 팀스피리트 훈련 재개 방침을 밝힌데 이어 2월에는 작전계획 5027의 일부 내용을 공개했는데 여기엔, 한반도 유사시 단기간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북한을 군사적으로 통일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94년 3월 11일 미국의 핵 항공모함인 칼빈슨호가 9년만에 처음으로 주일 미군기지에 입항한데 이어 4월 중순에는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했다.

      


    위기 - Surgical Attack


        심지어 미국은 영변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적 공격(surgical attack)'도 검토했다. 존 멕케인 상원의원과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 백악관 안보 보좌관을 지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원자로와 인근 재처리 시설을 파괴하기 위한 공중폭격을 감행해야 한다는 데 앞장섰다.  


        클린턴 대통령과 고어 부통령, 크리스토퍼 국무장관,갈루치 북핵대사, 페리 국방장관, 개리 럭 주한미군 사령관, 샬리 캬샤빌리 합참의장 등이 참석한 1994.6.16 백악관 국가안보 회의는 1차 핵위기의 '정점'이었다. 당시 이 회의의 의제는  남한에 미군을 대대적으로 증파하는 계획을 승인하려는 자리였다. 



    카터 前 대통령의 방북   


        그러나 바로 이 때, 클린턴정부의 승인을 얻지 못해 특사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북한을 방문(94.6.15-18)했던 카터 전 대통령이 백악관으로 전화를 걸어왔고, 잠시 뒤 CNN을 통해 북한이 핵을 동결하기로 했다고 발표한다. 이 때문에 국가안보 회의의 의제는 병력 증파가 아니라 외교적 해결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러나 당시 백악관의 분위기는 '카터의 방북 결과에 대한 환호보다는 미국이  속아넘어갔다는 우려가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카터'라는 변수로 인해 전쟁위기로 치닫던 1차 핵위기는 고비를 넘겼다. 안보리 제재 결의안은 표결에 가지도 못했다. 공교롭게도 1994년 7월8일 김일성이 사망한 날 미국과 북한은 협상을 재개했으며 10월 24일 '제네바 합의(Agreed Framework)'로 불리는 합의가 만들어졌다. 



    김일성 사망   


    위기국면이 해소되면서 남북간에도 정상회담이 추진됐는데 북한이 7월9일 12시 사망을 발표하면서 정상회담은 취소됐다. 당시 한국군에는 비상경계령이 내려졌다.



    제네바합의 (Agreed Framework)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고비를 넘긴 뒤 북.미는 1994.8.5부터 12일까지 제네바에서 열린 3단계 고위급 회담을 통해서 공동성명을 채택해 이른바 Agreed Framework로 불리는 제네바 북미기본합의문의 주요 골자를 마련했다. 이른바 북한이 주장했었던 '일괄타결'의 그림이다.  


        북한은 ▲핵 동결 상태를 유지하고 추가적인 흑연감속로의 건설을 중단하며 ▲사용후 핵 연료의 재처리를 중단하고 ▲시설을 봉인, ▲NPT에 잔류하며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이행할 것을 약속했다. 

        미국은 ▲경수로를 제공하고 ▲정치적.경제적 관계의 완전한 정상화를 추진하며 ▲소극적인 안전보장을 제공할 것 등을 약속했다. 


        그런데 1994년 9월23일부터 열린 3단계 2차회담에서 합의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회담 내부의 쟁점은 다음과 같았다. (1)북한이 특별사찰을 수용하는 시점. 미국은 북한에게 특별사찰을 조기에 수용하도록 요구한 반면 북한은 북미관계의 포괄적인 개선 이후로 미뤘다. (2)폐연료봉 처리 문제와 관련해 미국은 제 3국 이전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북한 내에 연료봉을 보관하겠다고 고집했다. (3)또 경수로의 형태를 한국형으로 할 것인지 여부도 쟁점이었다. 


        그런데 이 쟁점 외에도 '정치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중간선거를 앞둔 클린턴 정부는 북한의 전술에 말려들고 있다는 국내적 비판에 직면했고, 남한은 남한대로 경수로 비용의 상당부분을 내야하는 부담에다, 북한의 핵 투명성, 인권문제 등이 제기되면서 강경 여론이 형성됐다. 


        특히 당시 김영삼정부는 특별사찰이 확실히 보장될 때 경수로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해서 북한은 물론 미국 국무부와 마찰을 빚었다. 이는 협상에 있어서 북한이 한국형 경수로를 거부하게 하는 빌미로 작용하면서 협상지연의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 때 협상 무용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결국 북-미는 합의에 다가서고 있었다. 가장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특별사찰 시점과 관련해 경수로사업의 공사가 진행되는 중간에 특별사찰을 실시하는 것으로 타협을 본 것. 


        북미기본합의문에는 이 내용이 "경수로사업의 상당 부분이 완료될 때, 그러나 주요 핵심부품의 인도 이전에 북한은 북한 내 모든 핵 물질에 관한 최초 보고서의 정확성과 완전성을 검증하는 것과 관련해 IAEA와의 협의를 거쳐 IAEA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조치를 취하는 것을 포함하여 IAEA 안전조치 협정을 완전히 이행한다."고  기록돼 있다. 


        '상당부분'이 완료되는 데 까지 들어가는 시간은 10년 또는 그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보자면 "그 기간 동안 만약 미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 재개를 준비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어 있었다."  


        이로써 1차 핵위기의 위기국면은 일단 마무리 됐다. 



    제네바 합의의 손익계산   


        제네바 합의를 통해서 북한이 얻은 건 북미관계 개선, 국제사회로의 진출, 안보불안감 해소, 에너지 문제 해결 등이라면 미국이 얻은 건 1995년 NPT의 무기한 연장 여부를 결정할 검토 회의를 앞두고 북한의 도전을 차단함으로써 NPT체제를 공고화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남한은 당시 직면했던 핵 주권 포기 논란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당시 남한 내 일각에는 북한의 핵무장에 대비해 NPT의 금지대상이 아닌 농축 및 재처리 시설을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제네바 북미기본합의는 적지 않은 문제점 또한 노정했다.


        북한의 현재, 미래의 핵은 동결시킬 수 있었지만 과거의 핵 활동의 규명 시기는 늦어졌다. 또, 핵 개발 포기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악행을 보상했다'는 미국 내 강경파의 끊임없는 정치 공세에 시달리게 됐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핵 개발 시도 의혹을 통해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핵 동결과 함께 미국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미국이 합의사항 이행에 미온적으로 나옴으로써 경제.정치적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토대를 상실했다. 


        남한의 입장에서 보면 협상 과정에서는 배제된 채 제네바 북미기본합의 이후 경수로 건설비용의 70%를 지불해야 하는 결과를 맞았다.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 이후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였던 북미관계는 합의 직후 실시된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상하원을 장악하고 클린턴 정부의 대북 정책에 제동을 걸면서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선거 뒤 클린턴 행정부는 제재 해제에 대한 약속으로부터 한발 물러섰다. 많은 행정부 관리들은 어찌됐든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기 때문에 북한의 반발을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상하원을 모두 석권한 공화당은 대북 중유 제공 예산 심의를 늦추고 경제제재 완화에 부정적인 자세를 취했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벌어진 일이지만, 이는 미래 부시정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전주곡 같은 것이었다.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완화는 동결된 북한 자산 일부 해제, 북한의 미국 은행 시스템 이용 허가, 북한산 마그네사이트 수입 허용, 미국민의 북한 여행 자유화 등에 머물렀고, 중유 제공이 제때 이뤄지지 않음으로써 북한과 잦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KEDO설립 협정 체결, 폐연료봉 봉인    


        제네바 북미기본합의 한 달 후 IAEA는 북한이 영변과 태천에 시도하던 흑연감속로 건설 등 핵 활동을 중단했음을 공식 확인했다. 1995년3월에는 경수로 사업을 담당할 한반도 에너지 개발기구(KEDO)설립 협정이 체결되었고, 1996년6월에는 한 달 여의 협상을 거쳐 100MWe 경수로 2기를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북한은 1996년4월27일부터 IAEA의 감시 하에 8천여개의 폐연료봉 봉인 작업을 개시했다. 


        제네바합의에서 잠시 살펴봤듯이 북미기본합의가 이뤄진 지 미처 3주일도 못되어 미국에 공화당 다수 의회가 들어섬으로써, 북미 기본합의의 실천이 어렵게 되었다. 


        미국은 북미기본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 동결 목적을 성취한 데다 북한이 붕괴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이 그 무엇보다도 강력히 요구하던 대북 경제제재 완화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했다.  



    럼스펠드 보고서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한 미국 의회는 1995년과 1996년 2년간 국가미사일방어체제 구축을 포함한 국방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주력하였고 클린턴 대통령은 이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의회와 행정부간의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1997년 열린 4자회담도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공화당 다수 의회는 클린턴 대통령의 거부권에 대해 대반격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럼스펠드위원회의 구성과 럼스펠드위원회 보고서로 나타났다. 북한, 이라크 등으로부터 오는 탄도미사일 위협을 조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럼스펠드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이 위원회는 1998년 1월부터 6월까지 6개월간 활동한 후 7월15일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대폭 과장한 럼스펠드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후 부시정부에서 나타난 MD에 대한 집착은 이미 이때부터 잉태되고 있었던 것.  



    대포동, 혹은 광명성 1호    

          

        더구나 8월들어 미 언론이 금창리 지하시설을 핵 의혹시설로 몰고가자, 뉴욕타임즈가 1998년 8월 17일 정보소식통을 인용해 북한이 금창리 지하시설에서 비밀리에 핵 개발을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은 미국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궁극적으로는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1998년8월31일 장거리미사일 대포동을 시험 발사했다. 


     미국에 머물고 있는 재야 북핵문제 전문가인 한호석은 당시 북한과 미국이 (98년 8월21일부터 9월5일까지) 뉴욕에서 미국과 고위급 회담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광명성 1호는 이 고위급 회담이 진행되던 기간에 발사되었다. 실제로 "한호석"이 인용한 당시 '뉴욕타임스'는 "미 행정부가 영변 주변의 공사, 지난 8월 일본 상공을 넘어 발사된 미사일 시험을 포함하여 일련의 도발적인 행동이 나온 뒤로 북한의 의도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돼 있다.    


        한동안 안정적이었던 북미관계는 북한의 탄도 미사일 문제로 난관에 빠지게 됐다.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 수출 문제 해결에 진전이 있어야 경제 제재 완화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정하고 미사일 회담 제했다. 북한은 경제제재가 실질적으로 먼저 완화된다면 미사일 회담에 응하겠다는 입장. 


        북한의 의도가 무엇이것건 간에, 한편으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한동안 잠잠했던 '북한 위협론'을 다시 대두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북한의 탄도 미사일 위협을 제기한 이른바 '럼스펠드 보고서'의 타당성을 강화하면서 공화당 주도의 MD구상에 탄력을 붙였고, 대북 정책을 둘러싼 미국내 논란을 가열시켰다. 

     


    금창리 방문조사 


        이 갈등국면은 금창리에 대한 사칠과 북.미간의 미사일협상으로 수습됐다.  


        1999년 3월 북-미는 베를린 합의를 통해 금창리에 대해 두차례에 방문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1999년 5월 18일에서 24일 미국 대표단의 금창리 지하 시설 방문 결과 핵 시설이 아니라 '텅 빈 동굴'로 판명됐다. 


        이 과정에서 '햇볓정책'을 내세운 김대중 정부의 적극적 북미관계 중재와 남북 화해협력정책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본궤도에 올려놓는 데 크게 기여했다. 



    페리 보고서   


        클린턴 정부 역시 1기 때 국방장관을 지낸 윌리엄 페리를 대북 정책조정관으로 임영했고, 페리는 남한 일본 등 관련국과의 협의를 거쳐 관여정책에 기반을 둔 페리보고서를 내놓았다. 윌리엄 페리 미 대북조정관은 1999년 5월 25일에서 28일까지 북한을 방문했다. 이 기간은 금창리 1차 실사가 끝난 직후였고,  2차실사는 5월25일부터 이뤄졌다. 1999년 9월15일 페리는 대북정책 권고안을 의회에 보고했다.


      이 보고서의 골자는 미국이 북한을 있는 그대로 보고 미국이 북한에게 위협적일 수 있는 점을 인정 하는 가운데 외교를 통해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 해결과 북미관계의 정상화를 포괄적으로 타결하자는 것이었다. 

     

        페리보고서가 제출된 뒤, 1999년 9월 17일 백악관은 북한과의 합의를 발표했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제재 조처를 상당 부분 완화하고 북한은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이 진행되는 한 미사일 시험 발사를 일시적으로 유예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난 2006년 7월 5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시험 때까지 지켜진 이른바 “미사일 모라토리엄”이다.   



    미국 비전략문야 제재 해제    


        그러나 북한과의 합의가 이행되는데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이뤄진 뒤인 2000년 6월19일에야 미국은 평양에 대한 비전략 분야의 무역과 투자에 관련된 제재를 해제했다.  



    조명록 차수 방미    


        4개월 뒤 김정일은 국방위원회 제 1 부위원장인 조명록 차수를 워싱턴에 보냈으며, 그는 클린턴 대통령을 예방했다. 10월 12일의 역사적인 북미 공동성명(북미 공동 코뮤니케)에서 조명록 차수와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북한과 미국이 더 이상 "상대를 향해 적대적인 의사"를 갖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이 선언 뒤에 예정된 행사가 역사적인 클린턴의 방북이었는데, 무대 뒤에서 클린턴은 이 문제로 곤혹스러워했다. 12일 미국쪽 공식 문건은 국무장관이 "실현 가능성이 있는" 대통령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게 될 것이라고 돼 있다. 그러나 북한의 공동성명에는 이 "실현 가능성이 있는"이라는 표현이 생략돼 있다. 


      클린턴은 결국 북한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 이는 미사일에 관한 신중한 협상을 통해 세세한 내용을 손보기에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으며, 공화당 출신일 수 있는 다음 대통령의 손을 묶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안된다는 공화당의 비판에 부응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뮤니케가 10월 12일이었는데 미국대선이 11월,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는 상황이었다.  


        이 대목에서 해리슨은 "클린턴이 방북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은 김정일이 서 있는 카펫을 잡아당긴 격이었다. 미사일 합의와 다른 현안에서 미국이 바라던 양보를 한 김정일의 의지는 훼손됐다."라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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