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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풍(薰風)의 조건 / 2007.06.05.
    북핵리포트 2007-2012 2015. 8. 15. 16:56

    “이제 어떤 시한 내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관념이 어느 정도 옅어진 거죠. 해결을 향한 카드는 이제 테이블 위에 거의 모두 펼쳐졌고, 플레이어(player)들도 어느 정도씩 상처를 입었고. 이제 지켜봐야죠.”

    돌이켜 보면 2.13 합의 이후 처음 소집된 6자회담 6차 1단계 회의 (3.15~22)이후 지금까지, 사실 수면 위로 드러난 모습으로 볼 때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1994년 제네바 합의 이후 처음 시도되는 영변 핵시설의 가동중단. 그걸 이행하기로 한 약속은 시간계획까지 포함된 아주 구체적인 것이었지만, 그 조건으로 상정됐던 BDA문제가 진도를 내지 못하면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맴돌고 있다. 

    그러나 같은 “정지” 상태라 해도,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중국을 떠난 지난 목요일(31)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는 앞서 인용한 정통한 외교소식통의 발언에서도 감지할 수 있듯, 동일한 상황으로 평가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를테면 ‘열을 가해 100도를 향해 접근해가는 물’과, ‘버너를 꺼서 식어가는 물’의 차이라고 할까.

    ▲ 어디까지 왔을까?

    최근까지 미국은 BDA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국 내 자산규모 4위의 대형은행인 와코비아(Wachovia)를 동원해 기술적․법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조치를 해주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이민자의 나라, 그래서 법이 없인 유지될 수 없는 나라, 변호사들의 천국이기도 한 미국에서 그것도 9.11 이후 가장 강조됐던 애국법 311조(Patriot Act 311)를 뛰어넘어,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은 BDA 제재조치를 일시적으로라도 무효화시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단 하나, 지난 3월 재무부가 언급한 바 있듯, 마카오 당국이 BDA의 경영진을 교체할 경우, 그걸 명분으로 삼아 미국 법망에서 빈틈을 찾는 것이 가능한데 중국은 마카오가 엄연한 자치정부인 만큼 협조가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만약 북한이 BDA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이라도 영변 핵시설 가동중단의 예비적인 조치로 IAEA를 초청하는 등 ‘행동’을 위한 결의를 보여주기라도 한다면, 조지 부시 대통령의 리더십(Leadership)은 더 강력하게 작동할 것이고 그래서 미국 내부적인 문제들을 좀 더 쉽게 풀어갈 단서가 생길텐데, 북한은 지금까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내년까지 뭔가를 해보겠다는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속내가 그렇듯, 올해 대선 국면에서 카드를 쥐고 싶은 청와대는 그간 만지작거려왔던 수출입은행을 통한 자금중개 해법을 미국과 북한에 제안했다. 이는 지난 30일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의 말로도 확인된다. 그러나 미국도, 북한도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한국정부는 답을 얻지 못했다. 

    요컨대, BDA문제 해결의 방향으로 시도했던 가능한 모든 방법이 정점에 이르렀지만 결국 어떤 선을 넘지 못했고, 그 반동(反動)으로 오히려 마이너스의 에너지가 작용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 잘못 끼워진 단추

    아무리 뛰어난 증권사의 투자전략담당이라 해도, 그날의 증시 시황을 장이 시작되기 전에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주식시장의 여러 가지 변수, 이를테면 밤사이 미국 나스닥 지수, 중국증시의 움직임, 유가, 환율 등이 똑같이 주어진다 해도 그날의 장 마감 시황은 그 때 그 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는 사실 현재의 결과를 두고 ‘이 문젠 애초에 어디서 가닥이 잘못 잡혔다.’는 분석을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김계관의 베를린 합의 그리고 6자회담의 재개, 2.13 합의, 3월14일 BDA Final Rule, 3월19일 글레이저-힐의 발표 등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되새겨 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장면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게 사실이다.

    BDA라는 마카오의 작은 은행의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모든 금융거래를 차단하려는 데까지 이른 미국 재무부의 조치에 맞서, BDA문제를 6자회담의 전제로 건 북한의 전략은 - 어디까지나 북한의 입장에서 - 유효했다. 그리고 북한의 이 당면한 현안을 지렛대로 해서 비핵화의 시간표를 작성해 가려는 미국과 한국의 전략도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그런데, ‘협상에서의 악마는 세부사항에 있다.’는 격언처럼, 6자회담의 돌파구를 만들어낸 크리스토퍼 힐과 김계관의 베를린 회동의 문제는 “한달 내 BDA문제 해결”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용어정리를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물론 일각에선 ‘북한이 게임 도중에 골대를 옮기는 행동을 했다’, 다시 말해, 북한이 BDA자금을 찾아가는데 만족하지 않고 요구수준을 “인출”에서 “송금”으로 높이면서 문제가 복잡해졌다고 북한 책임론을 거론하지만 좀 더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복잡한 금융시스템에 대한 외교관들의 무지, 그리고 2005년 9.19 이후 북한이 일관되게 거론해왔던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확치 못한 분석이 더 큰 문제였다.

    요컨대, 이른바 30일 내 BDA해결, 60일내 영변 핵시설 가동중단을 합의하면서 “북한이 30일 안에 얻을 수 있는 건 2천5백만 달러의 단순한 인출이다.”라고 명시했던지, 국제금융시스템에 정상적으로 편입되는 걸 바라는 게 북한의 요구사항이라면, 애초부터 그걸 미국 내 법질서와 일관되게 풀어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낸 뒤 그 결과를 가지고 김계관 부상을 만났어야 했다. 

    ▲ 두 번째 단추

    이렇게 잘못 끼워진 단추 탓에, 아마도 미국은 북한이 돈을 문제없이 찾아갈 수 있는 정도의 해법을 상정하고 지난 3월14일 Final Rule을 발표했다.  조기에 법적 절차를 마무리 짓고 문제를 해결하는 이런 식의 방안은 한-미가 2006년부터 추진했던 이른바 “공동의 포괄적인 접근법”의 골격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 법체계에 일관되게’라는 대명제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북한이 돈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미국 재무부는 BDA를 강하게 문제삼고, 반대로 북한의 돈에 대해선 어물쩡 넘어가는 전략을 취했다.  여기서 중국은 상당히 기분이 상했다.

    이런 구도는 세부사항에서의 또 다른 실수를 낳았다.

    2.13 합의 뒤 다시 6자회담이 열렸는데, 정작 하이라이트인 북-미 회담은 열리지 않는 상황이 라이스-힐, 그리고 부시의 명에 따라 이 라인에 동조해 움직여간 글레이저를 다급하게 몰아간 갔다. 그래서 3월 15일 이후 북측과의 실무접촉을 통해 ‘괴상한 타협’이 이뤄졌고 그 결과는 19일 베이징 세인트 레지스 호텔 로비에서 글레이저와 힐의 공동 기자회견으로 공개된다.

    요약하자면, 마카오 방코델타 아시아에 묶여있는 북한자금 전액을 BOC(Bank of China)에 개설돼 있는 북한계좌로 옮겨 인도적인 목적으로 쓴다는 방안을 미국이 인정해 주겠다는 것.

    형식은 미국이 북한이 제안한 방안을 눈감아주는 형태였지만, 이 발표의 형태에 대해선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았고, 방점이 찍힌 부분은 BDA의 의제가 단순한 돈의 인출문제가 아니라 송금의 문제로 옮겨지는 효과가 발생했다. 합법과 불법자금을 어떻게 구분해 얼마나 찾아갈 수 있느냐는 초기단계의 유의미한 의제는 완전히 의미가 없어졌다. 당연히 전액이어야 하고, 당연히 송금이 되어야 하는 문제로 굳어진 것.   

    ▲ 문제의 핵심 - 불일치

    이 두 번의 ‘단추를 잘못끼움’으로 인해 갑자기 미국은 쫓기는 입장이 됐다. 소식통은 이 상황을 ‘카드를 치는데 내 패를 보여 상대방이 리드하는 대로 쫓아갈 수밖에 없는 시츄에이션’이라고 묘사한다. 부연하자면 이라크, 이란 문제로 낙제점을 받아왔던 부시정부의 외교에 그나마 그럴듯한 이정표를 세운 것이 2.13 합의였는데,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여줘야 하는 이행의 시한은 다가오고,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BDA문제 처리에 있어 북한 내부적으로 정리해야 할 문제도 돌출되면서 마음은 급한데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

    특히 미국이 당혹스러웠으리라 생각하는 건 어느 틈엔가 애초에 구상했던 해결의 구도와 현재의 상황이 그 근본에 있어 너무 다르게 변하게 됐다는 점이리라.

    앞서 설명했지만 기본적으로 재무부는 - 아마도 초기의 국무부도 - 북한이 돈을 찾아갈 수만 있으면 되는 수준으로 BDA 해법을 구상했고, 그런 개념 아래서 BDA의 해외거래를 완전히 차단하는 Final Rule을 발표했다. 따라서 애국법 311조는 거론할 것도 없이 Final Rule을 훼손하지 않고서는 원천적으로 송금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글레이저-힐의 3월19일 발표를 통해 미국은 사실상 “송금을 통한 해결”이라는 북한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 됐고, 그래서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할 주체, 북한 영변 핵시설 가동 중단의 조건이 되는 BDA문제 해결의 책임은 미국으로 넘어가게 됐다.

    다시 말해, 미국 법체계를 훼손하지 않고는 송금이 불가능한데, 송금을 해주겠다고 덜컥 약속을 해버린 것. 근본적인 불일치다.

    역시, 중국의 입장에서 BDA가 해외거래가 완전히 끊기는 조치를 당했는데, 친 자식(마카오 은행)이 울던 말던 더러운 돈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북한 자금을 엄연히 주주가 있는 중국의 대형은행을 통해서 북한에게 송금해준다는 건 이해관계에 있어 전혀 사리가 맞지 않는 길이다. 이 또한 불일치다.

    그래서 자금 중개를 해주겠다고 나설 미국 밖의 은행을 찾는 건 어려웠다. 고민 끝에, 그리고 뜻밖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와코비아(Wachovia Bank)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와코비아 해법은 언론에 노출돼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길이었다. 매파와 비둘기파, 국무부와 재무부, 민주당과 공화당 이런 구분을 언급할 것도 없이, 어떤 관료 조직도 스스로 내린 조치를 몇 달 만에 뒤집는 행위는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  엊그제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심포지움에서 만난 시걸(Leon V. Sigal) 교수도 “재무부의 하급관리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걸로 알고 있다.”고 말한다.

    ▲ 훈풍은 과연 불 수 있을까?    

    송민순 장관은 지난 24일 아셈 외교장관 회의 참석차 출국하면서 “기술적 문제나 법률적 문제는 뛰어넘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몇일 내 해결될 거”라는 22일 라이스 장관의 말과 연결시켰던 기자는 결과적으로 심각한 오보를 날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건,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희망”의 표현이었지 지금 일이 되어지는 과정이나 완료된 상황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었던 것.

    송장관은 31일 귀국한 뒤 외교부청사 2층 복도에서 기자들과 마주쳤다. 그리고 “훈풍이 불기 위해선 공기가 데워져야 한다.”며 특유의 비유법으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면 언제쯤 공기가 데워질 수 있는 것일까? 훈풍의 조건은 무엇인가?

    시간이 필요하다. 2.13 합의의 핵심 - 30일, 60일 등 시간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행동을 배치해가는 구조는 적어도 지금 시점에선 일정정도 빛이 바랬다. 따라서 오히려 관련국들이 느꼈던 긴장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북한은 그동안 이례적으로 중요 고비마다 영변 핵시설 폐쇄 의지를 대외적으로 강조해왔는데, 이제 당분간은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신 6자회담이라는, 9.19 공동선언, 2.13 합의라는 <구조물>에 축적되는 피로도는 조금씩 높아질 것이다.

    데이비드 올브라이트(David Albright)가 평화연구소(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에서 2006년 초 펴낸 보고서에도 나와 있듯이 2.13 합의 - 초기이행 조치에 대한 합의의 정신은 1994년 제네바 합의에서의 접근과는 달리, 할 수 있는 작은 걸음부터 시작해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도도하게 흐르는 불신의 강을 조금씩 좁혀 신뢰를 만들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해서 다음과정을 추동해낼 수 있는 동력을 얻자는 것이다.

    반대로 지금은 다시 의심이 시작되고 회의가 쌓이는 과정으로 침잠해 가다가 ‘이러다간 일을 그르치고 말겠다.’는 반작용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아마도, 이런 단계에 이르기까지 북-미 관계에서나 남-북 관계에 있어 일시적으로 상황이 악화되는 장면은 충분히 연출될 수 있다.  성과가 없이 끝난 남-북 장관급 회담이나 성사 여부 자체가 불투명한 6.15 공동행사 등도 바로 이런 맥락 속에 들어있다.

    크게 보자면, 미국이나 북한, 우리나라 모두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문제는 해결의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란 핵에 대한 북핵 해법식 접근’이 거론될 정도로 미국, 부시정부는 다자맥락에서 양자대화를 수용하는 접근방식의 유용성을 의미 있게 보고 있고, 또 그렇게 대외적으로 평가해 왔던 만큼 갑자기 뱃머리를 돌리지는 않을 것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영변 핵시설에 대한 서지컬 스트라이크(surgical strike)같은 시도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런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간의 부시행정부 외교는 이라크전 감행과 더불어 낙제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고스란히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북한도 미국이 그간에 기울인 노력을 알고 있는 처지에, 내년 말 아직은 그 실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다음 정권이 탄생할 때 까지 상황을 더 악화시켜봐야 얻을 실익이 전혀 없다. 그래서 또 다른 연료봉 재처리를 위해 북한이 영변 핵시설의 가동을 중단시켰을지도 모른다는 최근의 한 보도는 너무 앞서가는 거라 생각한다.

    어떤 시점에 어떤 모양으로 변화를 가져올 ‘기운’이 조성될지는 가늠하기 아직 어렵다.

    대표적으로는 크리스토퍼 힐이, 그리고 라이스 장관이 한국에선 송민순 장관이, 천영우 평화교섭본부장이 여러 차례 양치기 소년이 되는 걸 피할 수 없었던 지난 몇 달, 기자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은 판단을 했음을 반성해야 하는 처지에 지금 또 ‘언제쯤’이란 예측을 하고 싶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예측이 아니라 기대와 희망을 말하자면, 더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송 장관의 언급대로 공기가 충분히 데워져, 바람이, 훈풍이 불게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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