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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동기록 1만8천쪽의 무게 / 2008.05.11.
    북핵리포트 2007-2012 2015. 8. 16. 14:46

    성김 국무부 한국과장이 5/10일 만8천쪽, 7상자에 이른다는 북한 영변 원자로의 가동기록을 가지고 육로를 통해 돌아왔다. 분실을 우려해 이 기록을 화물로 부치지 않고 성김 과장과, 동행한 외교관들이 직접 운반할 것이라고 워싱턴 타임스는 보도했다.

    신고는 원래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이 받아야 하지만,'테러지원국 해제, 관계개선'이란 떡 주머니를 차고 있는 건 미국이고, 그 떡을 내주기 전에 앞으로 이뤄질 북한의 '신고'가 믿을만한 것인지 자료를 받아 검토는 절차를 밟는 거다.

    지난 번 칼럼에서 필자는 북한이 '냉각탑 폭파'의지를 표명한게 좋은 신호임에 틀림 없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냉정히 따지자면 '이벤트'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었다. 그러나 성김 과장이 무려 만8천쪽에 이르는 원자로 가동 기록을 "들고 나왔다"는 대목에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싱가폴 합의에서 검증을 위해 영변 원자로 가동기록을 제시하는 문제가 논의됐었던 건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열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통째로 갖고 나오게 했다는 건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부시대통령 임기 중에 되돌리기 어려운 이정표 하나를 세우고 가겠다는 의지가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원자로 가동기록(operating records)이란 무엇이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간을 1950년대 말로 되돌려 보자.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듯, 북한역시 1959년부터 옛 소련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고 핵 개발을 추진했다. 2갈래였는데 ▲ 하나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5메가와트 흑연감속로 등 영변 핵시설이었고 또 하나는 ▲ 소련과 정식협정을 맺고 들여오려 했던 발전용 원자로였다. 북한은 이 발전용 원자로 때문에 NPT, 핵확산방지기구에 (1985.12.12)에 가입했다.

    NPT는 핵 보유국(미국,소련,프랑스,영국,중국)과 그렇지 않은 나라들에 대해서 구분이 확실한데, NPT가 만들어지던 시점에 핵보유국이 아니었던 나라들은 가입을 할 때 핵 사찰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 가입을 한 뒤에도 여러가지 족쇠가 채워진다.

    북한에 대한 IAEA의 사찰은 1992년5월26일부터 실시됐는데, 이른바 '북핵 1차위기'라고 불리는 한반도를 위기로 몰아넣었던 거대한 파도는 표면적으로 보자면 핵사찰을 둘러싸고 IAEA와 북한 사이에 조성된 갈등에서 출렁이기 사작했다. 그 중 핵심은 바로 불일치(discrepancy).

    북한은 1989년에서 1990년 사이 손상된 연료봉을 통해서 실험적으로 90g을 재처리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최종순 북한 원자력부 외사국장의 표현을 빌자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양이었다는 것. 그러나 IAEA는 임시사찰을 통해서 북한이 1989년, 1990년, 1991년 3차례에 걸쳐 원자로에 들어있던 핵연료에서 수킬로그람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다고 결론지었다.

    이게 바로 재처리된 플루토늄 생산량을 둘러싼 '불일치' 문제였다. 플루토늄의 양이 중요한 건, 그 양에 따라 원자폭탄을 몇개를 만들 수 있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처리된 플루토늄의 양은 크게 2가지 경로를 통해 검증이 가능한데 그 하나는 원자로와 재처리시설(방사화학실험실)의 가동기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들 시설에 접근해 시료를 채취해 보는 것이다. 90년대 초 북한이 제대로 협조를 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IAEA 관리들이 불일치를 밝혀냈던 걸 보면 시료채취를 통한 검증은 그리 어렵지 않은 걸로 파악된다. 듣기로는 당시 IAEA요원이 북한측이 안보는 사이에 벽을 살짝 긁어 시료를 채취했다고 한다.

    결국 지금 북한이 그렇게 많은 분량의 '가동기록'을 미국에 넘겼다는 건 이를테면 "숨길 게 하나도 없으니 알아서 뒤져보라"는 얘기다. 국무부의 팩트시트(Fact Sheet)는 이 가동기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The DPRK has stated that the documentation provided May 8 consists of operating records for the five-megawatt reactor [5-MW(e)] and fuel reprocessing plant at the Yongbyon nuclear complex, where the DPRK had produced its stock of weapons-grade plutonium.

    These operating records date back to 1986 and are expected to cover reactor operations and all three reprocessing campaigns undertaken by North Korea.

    These documents will be examined thoroughly by a team of U.S. verification and other experts."

    http://www.state.gov/r/pa/prs/ps/2008/may/104558.htm


    북한은 옛 소련에 유학보냈던 학자들을 중심으로 자체 기술을 습득해 1986년 영변 5메가와트 흑연감속로를 완성시켰는데, 위에서 보듯 북한이 이번에 넘긴 기록은 1986년, 그러니까 영변원자로의 첫 가동 때부터 시작되고 있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던 3차례의 재처리 기간을 모두 포함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미국이 과거에 앞집의 굴뚝 연기(위성사진)를 보고 밥을 굶는지 먹는지, 또 얼마나 먹는지 대강 추정하던 것을 그집 식단(가동기록)을 아예 입수해서 볼 수 있게 된 셈이다.

    또 하나, 북한이 넘긴 기록이 뭉텅이 뭉텅이를 의도적으로 빼먹었거나 다 가짜로 조작해놓은 것이 아니라면 '신고의 사전조율' 정도의 의미를 넘어 3단계에 해당하는 '검증'의 과정으로 상당한 수준 진입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고 본다.

    전술한 대로 그렇게 자세한 식단표가 있다면 재처리된 플루토늄의 생산량을 시료를 채취해 검증하기가 무척 수월해 지고, 이렇게 정확한 생산량을 알 수 있게 되면 북한이 지난 2006년 10월 터뜨린 것과 같은 폭발장치가 몇개나 있는지 아는 것도 어렵지 않다.

    또 지난 5월8일 중국 주석과 일본 총리가 만나 발표한 문서를 보면 "중국측은 북한과 일본이 제 현안을 해결, 국교정상화를 실현하는 것을 환영하고 지지한다."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 저렇게 북미가 빠른 속도로 테러지원국 해제를 향해 움직이는데 일본에서 별 말이 안나오는 걸 보면, 납치문제에 대해 북한과 일본, 미국 중국 사이에서 어느 정도 교감이 이뤄진게 아닌가 추측된다.

    6월초를 전후해서 6자회담이 열린다는 얘기가 여기 저기서 나오는데,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문제는 이제 안정권으로 접근해가는 양상이다. 다만, 미국은 1주일이 멀다하고 평양을 오가며 접촉하고 있고 중국은 북한과 티벳-성화봉송 찰떡공조를 과시하고,일본도 교감이 시작되고 있다면 6자 가운데 유독 한국만 짐이되는 셈이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보자.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던 1994년 6월을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으로 겨우 고비를 넘기고 그해 10월21일 겨우 제네바 합의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아사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북한 정권이 오래가지 못할 거란 클린턴 정부의 판단, 그리고 럼스펠드, 매케인 등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의 압력탓에 북핵 프로세스는 결정적인 한 걸음을 더 내딛지 못했다.

    그리고 2001년, 대북특사를 담당했었던 프리차드의 표현을 빌자면 "북한은 악하다는 기본철학(basic "North Korea Bad" philosophy)"을 가지고 있던 부시정부가 들어섰고 상황은 악화됐다. 결국 북한은 플루토늄으로 만든 핵폭발장치를 터뜨리는데 까지 나갔고 다시 비슷한 상황이 만들어지는데 7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2000년 남.북은 정상회담을 했고 미적거리던 클린턴 행정부가 일부 경제제재를 푸는데 영향을 끼쳤다. 2008년 현재, 쌀과 비료 등 인도적 지원을 북핵상황과 연계시켰던 이명박 정부는 미국이 쌀 50만톤 등의 인도적 패키지를 마련하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강조했던 동맹국 미국은 북한과 함께 인도적 지원 패키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는데 통미봉남, 대통령을 "역도"로 부르며 극언을 서슴지 않는 북한이 요청도 안한 상황에서 새삼 식량지원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무척 어색하다.

    2000년 8년간의 민주당 집권이 끝나고 공화당 쪽으로 권력이 이동했다. 2008년 8년간의 공화당집권 뒤 민주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정 반대의 그림이다.

    그러나 힐러리 킬린턴의 참모 루빈(James Rubin)은 4/1 CNN토론에서 김정일을 미친 독재자(crazy dictator)라고 지칭했다. "조건없이 만난다"는 오바마를 공격하기 위한 발언이라지만 어휘만 따지자면 1기 부시정부의 '악의 축'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공화당 쪽은 어떤가? 셀리그 해리슨의 책 [코리안 엔드케임]을 보면 공화당의 매케인 후보는 1990년대 1차 핵위기 때 북한을 폭격해야 한다고 앞장섰던 인물이다. 최근에도 그는 "북한에 대해서 화가 난다"면서 강력한 압박수단을 동원할 것임을 예고했다.

    지난 2001년처럼 어쩌면 다시 시계바늘을 되돌리게 될지도 모르는 그래서 다시 먼 길을 돌아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 우리 정부는, 청와대는 어떤 정책을 마련하고 있을까?

    지난 주 5/6일 워싱턴 한복판, 오버도퍼 교수 등 이름있는 한국 전문가들이 대부분 모인 한 세미나에서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친분을 언급한 한국의 모 대학 교수라는 사람은 토론자 자격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친미면 보수, 친북이면 진보 이렇게 분류하는 Ideological Dogmatism 에 빠져있습니다. 최근 쇠고기 문제도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로 인식되고 있는데 아마도 한국의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날 하루 종일, 필자는 자기 얼굴에 침을 뱉은 것 같은 느낌에 시달렸다. 그리고 고민 끝에 결론지었다. 그 교수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의 친분이라는 것이 '쌍방 교류'가 아니라 그저 몹시 "일방적인" 것일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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