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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자회담 5차3단계 회의 취재기 (4) / 2007.02.22
    북핵리포트 2007-2012 2015. 8. 15. 12:47

    손가락질 하는 남자 

    외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그리고 더구나 그 주제가 6자회담처럼 ‘무거운’ 것이라면, 왠지 그 취재가 이뤄지는 분위기도 점잖을 것 같은 막연한 추측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도 흔히 그렇듯이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한 자리싸움이 으레 벌어지고, 특히 취재하는 방식이 달라서 그런 건지 일본 언론인들 간의 경쟁도 무척 치열하다.

    직전 5차 2단계 회의에선 그래서 기분이 좀 나쁜 일도 있었는데, 내가 서툰 영어로 질문을 자꾸 하니까 크리스토퍼 힐이 농담으로 “일본 기자들이 너무 많아서 답하기가 힘드네요..”라고 말을 했던 것. 그 자리에서 난 좀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고, 다행히 함께 갔던 동료 기자가 “일본기자 아니고 한국기자인데요.”라고 정정을 해줬다.

    이런 상황 때문에 미국의 협상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숙소에는 힐이 도착하기 전에 항상 대사관 직원 3-4명이 준비를 하고 있는데, 대사관의 보안관련 일을 맡고 있다는 남자 직원 하나가 직접 포토라인을 정비하고 튀어나오는 사람은 줄 뒤로 물러서라고 조정을 해준다. 

    힐에게 가까이 서려면 역시 일찍부터 자리를 맡고 기다려야 했지만, 그날은 상황이 좀 달랐다. 한국 취재기자단의 대표로 간 것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간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좀 편했던 것. 그래서 얼마 전부터 6자회담 때문에 알고 지내게 됐던 중국주재 한 외신기자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자기가 9시가 좀 넘으면 세인트 레지스 호텔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호텔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말한 대로 그가 왔다. 그리고 역시 알고 지내던 서울의 외신기자들과 함께였다. 모두 3명은 아는 사람이었고, 또 다른 도쿄주재 외신기자 한명이 동행했는데 금발에 나이는 50이 훨씬 넘어 보이는 신사였다. 물론 키가 180은 넘어 보였고 체구도 당당해 분위기가 예사롭지는 않았다. 그들은 호텔 로비의 커피숍에서 맥주 한잔을 하려던 참이었고 나도 합석을 하게 됐다.

    이 노신사와 함께 북한에 간 적이 있다는 서울의 외신기자는 그를 소개하면서 아주 유명하고 두꺼운, 김일성 리더십에 관한 책의 저자라고 소개했다. ‘예사롭지 않은’이라고 묘사했지만 실은 그 사람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관리 한명과 만나 자기 책에 대해 얘기를 나눈 에피소드를 꺼냈는데, “그가 자기 책을 읽어봤다고 하기에, ‘아 그걸 영문본으로 읽었나요?’라고 묻자 ‘아니오 번역된 걸로 읽었어요’라고 답했다”고 하면서, “저작권 협의를 끝내고 한국에서 공식 번역된 책이 없다면서 문제가 되지만 문제를 삼을 생각은 없다”고 했다.

    누구든 어느 자리에서나 기본적인 예의는 갖춰야 하는 법인데, 그의 태도는 영 엉망이었다.  그 자리에서 버럭 화를 내고도 싶었지만 초면에 똑같이 예의 없는 사람이 될 수는 없는 일.

    맥주 한잔을 들고 하던 얘기가 상당히 논쟁적인 성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역시 주제는 6자회담과 관련된 거였는데, 이 나이 많은 기자는 상당히 미국의 매파적인 시각으로 상황을 이해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논리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양상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논쟁’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는데 그건 이 나이 많은 기자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얘기만 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

    요약하자면 “분명히 베를린 북-미 접촉에서 뭔가 상호간에 오해를 한 대목이 있을 것이다. 뭔가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는데, 뭔가 한참 잘못됐다. 북한 핵실험에 따른 제재 문제는 다 어디 가고 사라졌냐? 내가 보기엔 서로 같은 사안을 두고 전혀 다른 식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백보 양보해서 만약 북한이 이번에 가동중단을 하기로 합의를 한다면, 북한과 미국 모두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얘기였다.

    물론, “뭔가 숨기고 있다”는 그의 말이 BDA에 해법을 두고 얘기하는 것일 수 있단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방식은 북한과 미국이 어떤 합의를 해서는 안되는데, 더 별을 줘야 하는데, 외교적 해결이 아니라 좀더 압박하는 수순을 밟아야 하는 건데 미국이 너무 져주는 것 아니냐 이런 맥락이 강했다.

    알고 지내던 중국주재 외신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 주제가 그토록 오래 논의돼온 사안인데, 이런 문제를 두고 베를린에서 여러 번 접촉까지 한 북미가 오해가 있을 수는 없다. 크리스 힐이나 김계관이 뭘 착각해서 합의를 이뤘다고 얘기하는 것은 넌센스다.”

    제대로 된 합리적인 논쟁을 위해선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늙은 기자는 그런 인내심이 전혀 없어 보였다.

    크리스 힐이 온단 얘기가 전해졌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힐을 기다리는 대형이 갖춰진 로비 쪽으로 이동했다. 인천공항에서 크리스 힐을 인터뷰하느라 알게 됐던 미국 자유의방송 기자는 김계관과 힐이 댜오위타이(釣魚臺) 밖으로 나와 오찬회동을 한 것 때문에 그 장소가 어디인지 찾지 못해서 몹시 힘들었다고 하면서, “북한과 미국이 만나 하필이면 이태리 식당에서 먹느냐”고 투덜댔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당신은 점심으로 뭘 먹었습니까?” 그가 답했다. “난 맥시칸 음식을 먹었지..” 그래서 둘이 함께 웃었다.

    힐이 도착했다. 뒤를 흘끗 돌아보니까 아까 함께 맥주를 마시던 그 늙은 기자가 질문을 할 생각인지 취재진 대열에 합류해 있었다.

    질문이 시작됐다. 깜짝 놀랐던 것이 그는 다른 사람이 질문을 하는 중간에 큰 목소리로 끼어들어 다른 사람의 질문을 막았다. “지금 당신은 장밋빛 얘기만 늘어놓고 있는데, 북한에 대한 제재는 다 어디로 간거죠?” 이건.. 질문이라기보다 훈계에 가까웠다.

    농담 잘하고 좀처럼 인상을 쓰지 않는 크리스토퍼 힐의 얼굴이 순간 당황스럽게 변하는걸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알다시피 힐은 미국 국무부에서 손에 꼽히는 지한파(知韓派)이며 협상파다.  이어 그는 다시 또 질문 공세를 폈다. 더구나 손가락질을 하면서 ‘미국이 대체 뭘 어쩌려고 이러는거냐.. 재무부하고는 손발을 맞추기나 한거냐’ 뭐 이런 내용의 질문이었다.  힐도 이번엔 참지 않았다. “당신, 왜 손가락질을 하면서 묻는거야!! 그리고 그게 질문이야 연설이지!!” 그런 모습은 정말 처음이었다.

    두꺼운 책을 쓰고, 자기 나름대로 명성을 얻고, 북한 평양에도 갔었고, 모두 자존심을 드높일 수 있는 훌륭한 일이리라.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갖추지 않으면, 같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향기가 풍겨지지 않는다면 난 결코 그 사람이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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