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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밥,나물,시계바늘 / 2007.09.15.
    북핵리포트 2007-2012 2015. 8. 15. 17:11

    우리나라에서도 이젠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지만, 미국에서도 지하철 역 앞을 지나가면 어김없이 무가지(無價紙)를 나눠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미국땅에 발을 들여놓은 지 이제 겨우 한 달 보름, 아직 다른 지하철역은 사정이 어떤지 잘 모르지만, 비엔나 던로링 역 앞에선 “EXPRESS”라는 제호의 신문을 나눠준다. 그렇지만 대개 AP같은 통신사 기사들을  짧게 요약해 보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필자의 경우, 대개 지하철 역 앞 자판기에서 35센트 어치 동전을 넣고 워싱턴 포스트를 꺼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신문은 한국보다 두껍다. 본판 외에도 수도권, 경제, 스타일, 스포츠, 광고 등등의 섹션이 줄줄이 따라붙는데 영어가 워낙 짧은데다, 미국에서 이슈가 되는 현안들이 어떤 것들인지 따라잡으려 애쓰고 있는 입장에선 그 두툼한 종이 뭉치가 한없이 부담스럽다. 그런데 더 고역인 건 최근 몇일 동안 고장난 전축 돌아가듯 ‘이라크 주둔 미군’을 어쩔 것인지와 관련된 기사가 하루에 3-4페이지, 사설 같은 부분까지 더하면 거의 5-6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담백하고도 맛깔스런 절밥이라도 매일 매끼 ‘그 나물에 그 밥’이라면 그 맛이 감할 수 밖에 없듯 매일 반복되는 이라크관련 기사는 이제 신물이 날 정도가 됐다.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지만, 부시 행정부는 이 전쟁은 도대체 언제 끝날 수 있는 건지, 얼마나 더 많은 미군의 희생이 필요한 건지, 미국이 이라크에서 달성하려는 건 무언지 등등에 대해 끊이지 않는 공격을 받아왔다. 거의 매일 죽어나가는 미군 병사들. 물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이라크인이 희생되고 있고, 재정 적자에 시달리는 입장에서 십만이 넘는 대군을 주둔시키는 일은 비용면으로만 따져도 엄청난 부담이다. 특히 내년 대통령선거를 준비하는 미국 대권주자들의 캠페인이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요즘 이라크전은 그야말로 ‘단골메뉴’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는 주제다.    

    여기에 몇일 전 이라크 대사와 미군 사령관의 미 의회 청문회가 열리면서 이라크전에 대한 논란은 그야말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어제(9.13) 저녁 부시대통령은 TV 생방송을 통해 ‘일부 병력을 철수시킬 것’이라고 밝히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정책적 실패를 시인한 것이 아니라, “Return on Success”라는 용어로 잘 포장된 동어반복, 다시 말해 ‘이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만큼 어느 시점까지 미군을 이라크에서 완전히 빼겠다.’는 내용이 아니라, ‘일단 올 1월에 증파했던 2만천700명 정도는 집으로 보내줄 수 있겠지만, 내 임기중에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얼마 전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에 관한 책을 출판한 워싱턴 포스트의 글렌 케슬러 기자는 "Fact Check ; 사실 확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 그리고 부시의 연설이 기본적인 사실조차 왜곡하고 있고, 심지어는 얼마 전 라디오 연설에서 언급한 내용과도 배치되는 대목도 있다고 조목 조목 비판했다.  예를 들어 부시 대통령이 퇴역장성 제임스 존스의 최근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이라크 군(이제 미군 대신 이라크의 치안을 제대로 담당해야 할)이 훨씬 좋아지고 있다.”고 했는데, 바로 그 보고서는 사실 “앞으로 12-18개월 안에 이라크 군이 의미있는 역할을 담당하기 어렵다.”고 돼있고, “2만5천의 이라크 경찰은 분파주의와 부패에 빠져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는 것. 또, 글렌 케슬러의 기사가 아니라도 하필이면 예고됐던 부시 대통령의 연설 직전, 미국정부 편에 섰던 수니파 지도자가 폭탄테러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 일은 14일자 워싱턴 포스트에 부시 연설에 관한 기사와 거의 같은 분량으로 보도됐다. 

    최근 방송과 신문뉴스를 도배하다시피 한 “이라크전”이라는 주제가 주는 지루함은 비단 필자만 느낀 것이 아니었나 보다. 문화나 예술 분야 기사를 싣는 "Style" 섹션에 부시대통령 사진이 등장하길래 ‘이건 또 뭐야’하고 심드렁하게 페이지를 넘기고 보니, 약간 과장하자면 “방송시간 쓸데없이 잡아먹는 대통령 연설은 이제 그만 듣고 싶다.”는 취지였다. 제목은 "On the Nation's TVs, A Familiar Picture."이었는데, 기사 내용 가운데 압권은 “대부분의 방송이 대통령 연설 생방송을 짧게 처리하고 말았는데, CNN은 어쨌든 뉴스를 계속했다. 거긴 원래 뉴스만 하는 데니까.”라고 표현한 대목이다.  

    이렇게 죽 글을 써놓고 보니 전체적으로 ‘이라크전’이란 수렁에 빠져 진퇴양란의 처지에 놓인 미국의 부시대통령을 비웃는 격이 됐다. 그런데, 태평양 건너 한반도 주변은 어떤가? 우연의 일치인지 가깝고도 먼 이웃 일본의 최고 지도자였던 아베, 그가 ‘아름다운 일본’, ‘주장하는 외교’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구성했던 내각은 끊임없는 잡음을 일으켰고, 결국 아베는 견디다 못해 몇일 전 전격 사퇴 선언을 하고 몸져누웠다. 우리나라는 또 어떤가? 심지어 누드사진까지 등장한 스캔들 - 물론 아직까진 본인의 문제가 아니라 해도 - 로 좋지 않던 지지율이 더 나빠지고 있다고 한다.

    그저 “아무려면 어쩌랴.”하고 외면하고 싶다. 그러나 그러기엔 핵실험과 UN 안보리 제재 결의까지 헤쳐내고 어렵게 어렵게 여기까지 온,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한 훈풍이 혹 온도가 달라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떨치기 어렵다. ‘성공적’이었다는 제네바 북미접촉 이후 이제 몇일 앞으로 다가온 베이징 6자회담, 그리고 10월 남-북 정상회담 등등.

    혹시 힘이 빠진 지도자들 탓에 외교적으로 담판을 짓고, 결단을 해야 할 중요한 순간들을 놓치게 되는 건 아닐까? 그리고 결국 한반도 비핵화의 시계바늘이 다시 반대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는 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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