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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스는 괴로워 / 2007.10.26
    북핵리포트 2007-2012 2015. 8. 15. 17:17

    남-북 정상회담 직전, 워싱턴의 한 세미나에서 만난 한국문제 전문가 오버도퍼 교수는 미국 조야의 일부 우려 섞인 목소리에 대해, “6자회담이건 뭐건 간에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도록 하자는 건데 남-북 정상회담을 우려할 일이 뭐가 있느냐?”고 반문한 일이 있다. 그리고 얼마 뒤, 인공위성이라는 가공할 문명의 이기(利器) 덕에, “금단의 선을 넘는다.”고 하던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길 언행은 태평양 건너 미국 땅에도 실시간으로 중계 됐다. 또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6자회담 6차2단계 합의문과 남북 공동선언이 잇따라 나왔다.

    서울에선 종전선언의 주체와 시기, 평화체제 문제에 대해 또 NLL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느냐의 쟁점에 대해 한참 논쟁이 진행되고 있고 한다. 이 논쟁은 전문가들의 학술 토론회는 물론 국회 국정감사장에서도 벌어진다. 한편 남-북간에는 총리회담이 준비되고 있다고 하고, 미국의 북한 핵시설 불능화(不能化) 기술팀은 자주 북한을 드나들고 있다. 어찌 보면 뭔가 큰 변화가 바로 코 앞에 닥쳐있는 듯 한 분위기다.

    그런데 이곳 워싱턴에서 체감하는 온도는 무척 다르다. 요즘 워싱턴 포스트나 뉴욕타임즈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반도 관련 기사는 평화체제는 고사하고 오직 “북한-시리아 핵 연계설”에 관한 내용 뿐이다.

    24일자 워싱턴 포스트가 정부가 아닌 민간기관(ISIS)의 보고서를 인용해 이스라엘에 의해 폭격당한 시리아의 시설물은 북한의 영변 핵시설과 같은 "흑연 감속로(gas-graphite reactor)"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그 근거는 ① 이제 불능화 과정에 들어가려 하는 영변 핵시설과 크기가 거의 같고 ( 영변 157 X 154 feet , 시리아 154 X 154 feet ) ② 근처에 민가도 없는데 유프라데스(Euphrates River)강변에 펌프장이 건설돼 있다는 것.

    그리고 기사 옆엔 컬러로 된 해당 지역의 위성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관련사이트) http://www.isis-online.org/publications/SyriaUpdate25October2007.pdf

    워싱턴 포스트 기사는 취재된 팩트(fact)를 위주로 담담하게 쓴 것이었지만, 행간의 의미는 분명해 보였다 ; "2007년, 올해 12월 안으로 영변 핵시설을 불능화(不能化)한다는데, 그리고 그것이 2기 부시행정부의 외교적 성과라고 자랑하고 싶을텐데, 현실을 직시하라. 북한은 앞으로는 영변 핵시설을 못쓰게 한다면서 뒤로 돌아서서는 자기네 원자로와 똑 같은 복사본을 시리아에 옮겨놓으려 하고 있었다.“

    다음날(25일) 나온 뉴욕타임스의 기사는 같은 사진을 거의 같은 크기로 인용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 - 북핵외교가 제대로 가고 있는 거냐는 힐난을 부시정부 내부의 매파 강경론자의 목소리를 빌려,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 의원의 입을 빌려 쏟아놓고 있다. 발췌해 인용하자면 이렇다.

    왜 시리아 시설 폭격의 진실을 쉬쉬하고 있는가. 만약 그 정보에 대해서 의원들이 좀더 알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pending) 북한과의 핵 협정을 걱정스러워 할 것이다. 1기 부시행정부가 그토록 씹어댔던 클린턴행정부의 덜떨어진 대북정책을 지금에 와서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 아니냐? 라이스는 뭔가 협정을 맺겠다는 욕심으로 안보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 아닌가? 왜 크리스토퍼 힐은 길이 이것 - 클린턴 정부의 대북정책으로 U-turn한 것 - 뿐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래도 부시행정부의 대북외교를 그냥 놔둬야 겠느냐?” 매파의 집결을 촉구하는 격문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달 전, 필자는 이 문제를 두고 “정보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부여할 것이냐.”가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지만, 언론들이 한 두 번도 아니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북한-시리아 핵 연계설”을 보도하고 있는데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까지 불렀던 조지 부시 대통령이 대북정책의 방향을 유지하고, 라이스장관에게 변함없는 지지를 보내고 강경 발언을 자제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얼마 전엔 대통령과 라이스 국무장관, 그리고 매파의 고위인사가 합석한 자리에서 상당히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부시 대통령이 라이스의 손을 들어줬다는 소문도 들린다. 

    다시 말해 현재 진행중인 온건노선의 대북정책은 부시의 전폭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라이스 -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가 힘겹게 페달을 밟고 있는 자전거 같은 것이다.

    그런데, 최근 라이스 장관이 몹시 괴로운 듯하다. 24일 그녀는 의회 청문회에 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반전론자인 한 여성이 갑자기 손에 붉은 물감을 묻히고 다가가 “이런 전범자! 너의 손엔 수백만 이라크인의 피가 묻어있다.”라고 소리쳤다. 붉은 물감이 묻은 손과 라이스 장관의 얼굴과는 겨우 2-3센티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왜 하필 라이스에게 그랬을까. 부시행정부 1기 장관이 아니라 NSC에서 일하던 라이스는 실제로 이라크전 발발에 있어 역할을 부정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라크 문제는 부시정부, 선거를 앞둔 공화당의 커다란 혹 같은 존재이다.

    국무장관 라이스가 한 일 가운데 상당히 비중있는 것으로 평가됐던 인도와의 핵협정은 지금 궤도를 벗어나 삐걱거리고 있다. 이란과 미국과의 갈등은 곧 뭔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상황으로 치닫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그 탈 많은 이라크에서 터키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중동 순방길에 나서는 라이스에게 헨리 키신저는 23일 기고문을 통해 “라이스 당신이 뭔가 성과를 내고 협정을 성사시키려고 서두르는 듯한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문제는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고, 감당할 수 있는 용량보다 더 큰 부하를 걸면 터져버릴 수 있다.”고 충고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인다는 라이스 장관의 대외정책. 이젠 대통령의 임기도 얼마 남지 않았고 추수는 해야겠는데, 손에 잡아 든 곡식들이 여전히 푸른빛이 돌고 있는 상황이라고 할까.

    종전선언이든 평화협상 개시선언이든, NLL이든 공동어로구역이든 한반도 비핵화는 남-북이 제 1의 당사자임에 틀림없지만 오래 전부터 북한은 스스로의 거래상대를 미국이라고 지목하고 둘만의 협상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 한다. 북한 입장에 라이스 장관은 상대편 상단 행수의 심복쯤 될 것이다.    

    아직 영글지 않은 이삭, 오히려 곳곳에서 터지는 악재들로 라이스 장관은 몹시 힘겨워 보인다. 겨우 돌파구를 찾아 막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듯 했던 북핵외교를 지켜보는 필자의 마음도 덩달아 초조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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