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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통령의 말 / 2008.11.24.
    북핵리포트 2007-2012 2015. 8. 16. 16:29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Wikipedia)는 외교를 '국가나 그룹의 대표 사이에 협상하는 기술이나 그런 행위를 일컫는 말(Diplomacy is the art and practice of conducting negotiations between representatives of groups or states)'로 정의한다. 이어 그 수단과 관련해 외교란 공손한 매너로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목적한 바, 전략적인 우위나 상호간에 받아들일 수 있는 절충안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공적인 자리에서 외교관의 말이란 몹시 모호하다. 기자 앞에 서면 적어도 15분 이상은 말을 하는 미국 국무부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에 대해 우리나라의 한 고위 외교관은 사석에서 "나는 머리가 나빠서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참 존경스러운 사람"이라고 농반 진반으로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그건 단순히 말을 길게 하는게 어렵다는 얘기가 아니라 기자들의 직설적인 질문에 '모호성'을 유지한 채로 답을 하고, 그러면서도 은근히 사실(fact)의 일면을 시사해 주는 고난도의 기술이 필효하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외교관들은 여러가지 '장치'를 사용한다. 지금은 국회의원이 됐지만 '송대령'이란 별명으로 불렸던 송민순 前 외교부 장관의 경우 기자들의 질문을 알듯 모를 듯한 비유법으로 피해갔다. 대개 외교부나 통일부 국장급을 일컫는 '당국자'들은 오프더 레코드 브리핑이나 딥 백그라운드(Deep Background) 브리핑을 애용한다. 협상이 진행되는 상황을 알려주긴 해야 겠는데 '말'이 인용 되면 어느 쪽에서 정보가 샜는지 금새 알 수 있는 만큼 아예 그 부분은 듣고도 어느 시점까지는 기사를 쓰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거나 그저 '알려졌다..' '전해졌다..' 정도의 강도로 기사화 해줄 것을 당부하는 거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방코델타 아시아 은행(BDA)에 묶여있던 북한의 돈과 관련해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의 말을 사석에서 전한 한 고위 관리의 '오프 브리핑'. 당시 그 문제 때문에 북핵 협상이 한 발자국도 못 나가던 상황이었는데 힐 차관보는 당시 신뢰가 형성돼 있던 우리측 수석대표에게 사석에서 "BDA인지 뭔지 그걸 확 불살라 버리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사실 그게 솔직한 힐 차관보의 마음이었을 텐데, 만약 6자회담 협상장에서, 북측 김계관 수석대표가 듣는 상황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북한은 특히 명분을 중요시한다. 아마도 그건 이른바 '수령'이 영도하는 폐쇄적인 체제 자체의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실질적으로 내 놓을 만한 협상카드가 몹시 한정되 있는 다시말해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북한의 현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미국, 중국 등 다른 5개 나라에서 중유를 지원받는 것과 관련해서도 북한은 '우리가 가동했다면 엄청난 전기를 생산했을 원자력 발전소를 짓지 못하게 하고 그나마 이미 지어져 있는 50메가와트 원자로도 가동을 중단시켰으니 당연히 기름을 내 놓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에너지 사정이 형편 없으니 기름을 다오'가 아니다.   

    '과거 지도자와 했던 약속을 지키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그동안 북한은 예의 '명분론'으로 남측을 압박해 왔다. 그리고 최근 같은 맥락에서 '12월 1일 부로 조치를 하겠다'며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얼마 전 칼럼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런 북한이 내세운 명분 뒤에는 올 봄 북한에 가지 않은 쌀과 비료, 우리측의 통신선로 관련 장비제공 유보, 6자 차원에서 에너지 대신 주기로 한 철강 자재 등의 제공 보류 등 실리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최근 남북관계가 심각하게 경색될 기미를 보이자 남경필 의원 등 한나라당 내에서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달라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대내외의 목소리들이 일부 반영된 것인지 정부는 몇가지 조치들을 했다. 그 가운데는 통신장비 제공과 관련해 접촉을 갖자는 제안도 있었고, 철강 제공문제를 '검증의정서'에 꼭 연계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발언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유화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11/22일 대변인 담화를 통해 "선포한대로 그에 단호히 대처해 나갈 것"이라고 했고, 24일 실제 조치가 취해졌다.

    이런 일이 일어난 배경에는 북한의 여러가지 의도가 깔려 있을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그 가운데 하나가 미국에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상황에서 남-북간의 긴장 수위를 높여 후순위로 밀릴지 모르는 북한 핵문제를 우선순위가 높은 의제로 부각시키려는 의도일 걸로 분석한다. 그러나 이렇게 상황이 나쁜 쪽으로만 향하는 데에는 전혀 전략적으로 보이지 않는 우리 정부의 대처방식, 그리고 너무나 비 외교적인 대통령의 '말'이 명분을 생명처럼 여기는 북한에 끊임없이 '땔감'을 제공해주는 것도 또 다른 원인이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조평통 대변인 담화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남조선의 현 집권자가 얼마전 미국에서 기자간담회라는것을 벌려놓고 북남관계에 대해 횡설수설하면서 《자유민주주의체제하에서 통일하는것이 최후목표》라고 공공연히 줴쳤다." 이 '담화'가 지칭하는 건 워싱턴 시각으로 16일, 우리 시간으로 17일 새벽에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기자간담회다. 당시 이 대통령은 뭐라고 말한 것일까? 발췌해 보자면 이렇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에 나와서 매년 국민을 남한테 얻어먹이는  신세를 면해야 한다. 한국의 브랜드 가치가 경제수준 만큼 못따라 오는데 3가지 이유가 뭔지  청와대에 와서 외국기관으로부터 브리핑을 받은 적이 있다. 첫번째가 노사문제, 두번째는 시위문화, 세번째는 북한 김정일 위원장이 대한민국의 이미지까지 나쁘게 만든다고 했다. 첫째와 둘째는 시정할 수 있는데 셋째는 우리 맘대로 안된다.

    북한문제의 경우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통일하는 게 최후의 궁극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이 평화스럽게 공존해야 한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에 나오면 대한민국이 중심이 돼 국제사회가 북한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말이야 맞는 말이다. "국민을 남한테 얻어먹이는 신세"라는 표현도 그렇고, "김정일 위원장이 대한민국의 이미지까지 나쁘게 만든다"는 것 도 그렇다.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통일하는 게 최후의 궁극 목표"라는 표현은 우리 헌법에 나와있는 표현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일국의 대통령이 기자들 앞에서 온 브리핑(On-Briefing : 내용이 녹취, 공개되는)으로 한 말이라고 보기엔 너무 직설적이며 비 외교적이다.   

    엉터리 폭탄 같은 걸 갖고 있는지 어쩐지 모르지만 '국민을 남한테 얻어먹게 하는' 힘 없고 배고픈 나라를 두려워하고 두렵기 때문에 목소리를 낮추고 말조심을 하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외교라는 것이 아무리 등 뒤에 비수를 들고 있더라도 그 앞에서 만큼은 부드러운 매너를 잃지 않고 말을 하고, 그 말을 통해 상대를 제압하고 설득하고 원하는 것을 이뤄내는 기술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대통령이 한 나라의 '대표 외교관' 역할을 맡고 있는거라면 그 역할에 걸맞는 좀 더 '전략적인' 좀 더 '외교적인' 수사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West Wing이라는 정치 드라마를 봐도, 미국의 정부 내에서 백악관 내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기록한 관련 책자를 봐도 대통령은 물론 미국의 관리들의 말(기자 간담회를 포함해)은 대부분 즉흥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대개 참모들이 어떤 용어를 사용하고 어떤 강도로 이야기를 할 건지 사전에 많은 토론을 거친다.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하다 못해 우리 외교부 대변인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외교부는 매일 아침 PG회의 (Press Guide)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청와대에선 그런 과정이 없는 걸까? 만약 있다면 기자간담회에 등장한 대통령의 너무나 직설적인 언어는 치밀한 사전조율을 거쳐, 선택된 말들이었을까?

     


    [참고]

    조평통 대변인 담화 (11/22)

    http://blog.naver.com/eye4all/20057525214


    이명박 대통령 기자간담회 (11/17)

    http://blog.naver.com/eye4all/2005752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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