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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근 vs 성김 가상 대화록 / 2009.10.29.
    북핵리포트 2007-2012 2015. 8. 17. 18:38

    지난 2006년 9월, 미국의 싱크탱크인 노틸러스 연구소 홈페이지에는 칼린 前 국무부 과장의 글이 하나 올라왔다. 강석주가 강연한 내용을 옮겨놓은 형식으로 돼 있었는데 알고보니 지어낸 가짜였다.  당시 북한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을 상황을 짐작케 하기 위한 '글쓰기의 기법'이었는지는 몰라도 국내 언론에서 대서특필됐다가 전문 취소가 되는 등 큰 소동을 빚었다. 


    이번 '리근 vs 성김 대화록' 역시 가상의 대화록이다. 남-북 비밀접촉이 있었다는 지난 20일 MBC의 보도를 두고, "허무맹랑한 소설같은 이야기"라고 반응했던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또 다른 소설같은 이야기인 셈이다. 


    ㆍㆍㆍㆍㆍㆍ


    샌디에고 시내의 노틸러스 식당. 구름같이 몰려든 취재진들을 따돌리고 들어온 리근 북한외무성 미국 국장은 짙은 밤색의 고풍스런 의자에 털썩 앉으며 동행한 외무성 관리에게 외투를 건넸다. 


    아직 시차에 적응하지 못한 탓에 약간은 어찔한 피로함이 그를 엄습해 왔다. 하루 종일 NEACD 일정으로 신경을 써야 했던 하루였다. 5분쯤 지났을까 성김 미국측 6자회담 수석대표가 식당에 도착했다.  


    "어서 오세요" 


    서로 손인사를 다시 나누긴 했지만, 어쩐지 어색하다. 


    "오늘 만나뵙자고 한 건, 조용히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요." 


    성김 대표의 말에 리국장은 동의했다. 그들은 방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눈짓을 했다. 


    리근 국장이나 성김 대표, 영어와 한국어를 모두 할 수 있기 때문에 통역은 필요 없다. 


    방 안에 두 사람이 남게 된 뒤, 리 국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손님을 불러놓고 대접이 그래서야 됩니까? 재무부가 또 재제조치를 내놨더군요." 


    "압록강 개발은행 때문에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BDA 때 보셨겠지만, 재무부는 국무부의 통제권 밖에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한 얘기지만 지금 이쪽 분위기는 백악관 NSC도 그렇고, NSC 밖 정치담당 참모들도 그렇고 제재의 고삐를 늦춰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국무부 내에서도 저나 보스워스 특사 정도만 '그래도 만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에요." 


    "담배를 좀 태워도 될까요?" 


    리 국장은 굳은 표정으로 성김 대표에게 말했다. 


    "그러시죠.." 


    한동안, 방안에는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우리 공화국이 도대체 어쩌기를 바라는 겁니까? 구애공세(charming offensive)라고까지 얘기하며 공화국을 망신시키면서, 어디까지 옷을 벗으란 말입니까?" 


    전혀 외교적이지 않은 돌발적인 수사에 성김 대표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근 국장의 흥분한 표정을 지켜보던 성김 대표는 잠시 숨을 돌린 뒤, 차분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아시겠지만, 북한이 태도를 달리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할겁니다. 그래야 설득이 됩니다. 6자회담 복귀, 2.13과 10.3에서 이뤄졌던 약속으로의 복귀가 있어야 할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쪽에선 도저히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생기지 않습니다. 보스워스 특사를 공화국에서 초청하셨는데, 특사께선 가서 대화할 의지가 분명하지만 그분이 갈 수 있는 명분이 생겨야 하는 겁니다." 


    리근 국장의 목소리는 여전히 흥분된 상태였다. 사각형에 가까운 리 국장의 검은 얼굴에 붉은 기운이 돌았다. 


    "좋아요 좋아.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이 모든 일들이 당신네 나라의 적대적 행위에서 비롯된 거란 사실을 우리가 얼마나 더 얘기를 해야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부쉬 정권 때 우리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우리의 주체적인 기술로 이룩한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부수고, 기계들을 뜯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원자로의 가동 기록도 다 넘겼습니다. 그 때 성김 대표가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폭발음과 함께 흩어지는 콘크리트 조각들을 몹시 괴로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우리 공화국의 과학자들을..." 


    리근 국장은 목이 타는지 물을 들이켰다. 


    "그런데 당신네들이 골대를 이리 저리 옮기지 않았습니까? 우리 김계관 동지가 크리스토퍼 힐 선생과 신고서를 얘기할 땐 전혀 거론하지도 않던 무기화된 핵,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거론하며 그걸 검증해야 한다고 그랬던 것 아닙니까. 당신네들의 적대시 정책이 포기되지 않고 엄연한데, 그럼 우리가 아무런 보장도 없이 우리의 자위력을 강도 맞듯이 다 빼앗겨야 한다는 겁니까?" 


    "국장님 답지 않게 흥분을 하시는군요 좀 진정하시죠." 


    성김 대표는 리 국장을 달랬다. 


    "그렇지만 인정 하셔야 합니다. 지금 상황을. 그리고 우리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귀국에서 그런 논리를 펴는 건 자유지만, 결과적으로 협상이 진행되고 그 협상에 따라 보상이 이뤄지고 그러나 핵 문제에 접근해가면 결국 파토가 나고 다시 상황악화가 재연되는 현실이 여러 번 반복 됐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지만 이제 국제사회에선 오래된 레코드판 튀듯 결론없이 반복되는 이 문제에 대해 같은 말을 여러번 사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는 강한 공감대가 형성이 돼있는 상황입니다."     


    리 국장은 붉은색과 흰색이 절반 정도씩 들어간 말보로 담배갑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담배 한 개피를 꺼냈다.   


    "기대하진 않았지만...접점이 별로 없군요" 


    성김 대표는 리 국장을 설득하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실 건 아닙니다. 아시겠지만 지금은 임기 초기입니다. 집권 2기에 방향을 잡은 지난 정권과 상황이 다르죠. 또 우리 대통령께선 '오바마 바이든 플랜'을 통해서, 그리고 그 이후 여러 기회를 통해서 분명히 하셨지만 핵없는 세상을 중요한 국정목표로 세우고 계시고, 귀국에서 명분을 준다면 분명한 상응조치를 해줄 자세가 돼 있습니다. 올브라이트 - 조명록의 상호방문에도 불구하고 성사되지 못했던 국교관계 수립 같은 목표도 전혀 불가능한 얘기가 아닙니다."


    리근 국장은 성김 대표의 눈을 똑바로 보며 답한다. 


    "물론 그러시겠죠. 그렇지만, 우리의 자위수단을 먼저 포기하라고 하겠죠.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잠시 시간을 둔 뒤 리 국장은 말했다. "하지만 일단 '수교'라는 그 말은 접수를 해 두겠습니다." 


    성김 대표가 대화를 이어갔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사실 우리도 부담이 있습니다. 10월에 간다 11월에 간다 보도가 나오고 있는데 대화를 하자는 귀국의 손을 마냥 뿌리치고 있을 수도 없는 거고. 국무부 내에서도 그런 목소리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지난 번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갔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이 6자회담이란 말씀을 하셨는데, 국장께서 강하게 얘기하시지만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닫고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중국은 한국과 일본에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고 했지만, 저는 지금 국장님께 얘기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됩니다." 


    "그런 강한 조건을 고집한다면, 강석주 부상을 만나게 되는 일은 없을겁니다. 미국이 조건을 바꿔야 다자건 6자건 가능합니다." 리 국장은 어둠이 완전히 내린 창 밖을 바라보며 독백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조금씩 목소리의 톤이 높아졌다. "골드버그가 아시아 전체를 돌아다니며 우리 혈맥을 막아놓고, 배를 멈춘다 화물을 검색한다 각종 제재로 팔을 비틀면서 도대체 무슨 대화를 하겠다는 겁니까?" 리 국장이 말을 마쳤을 때 그는 다시 성김 대표를 응시하고 있었다. 


    엉뚱하게도 성김 대표는 식량얘기를 꺼냈다. 


    "올해 남측의 비료지원이 끊겨 작황이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만.... 최근 남북접촉에 대한 평가는 어떻습니까?"


    "그건 내 영역이 아닙니다만.... 김계관-힐 선생 싱가폴 회동과는 좀 다르지요.. 중국이 하도 만나라고 하니까 만나긴 했지만, 대통령의 형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갖고 움직이는 건지. 별 얘긴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성김은 입가에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런가요..." 조금 쉬었다가 성김 대표는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뭐라도 동력이 생길만한 이벤트를 자꾸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같은 비둘기파들이 숨 쉴 공간이 생기고 대화를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죠. 일본하고도 얘기가 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우리 위원장님이 통큰 결단을 내린 건데 일본쪽에서 차버린 일 아닙니까. 정권도 바뀌었는데 새 내각이 제대로 된 생각을 한다면 마음을 고쳐먹어야겠죠." 사실 일본과 한국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판을 움직여보려는 중국과 북한의 연합작전은 생각했던 것 만큼의 속도를 내고 있지 못하다.  


    "자, 그럼 이정도로 해 두고.. 혹 준비해두신게 있다면 지금 보여주시는 게 어떨까요? 세부적인 내용까지 많이 연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뭐라던가.. '성김 프로세스'라 하던데요.." 


    서로의 입장을 얘기하는 건 더 이상 해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러나 미국이 생각하는 세부적인 그림이 어떤 것인지 한 번 봐둘 필요는 있는 거다. 


    성김  대표는 검정색 가죽 서류가방에서 미색 봉투하나를 꺼낸다. 


    "그러죠. 뭐라 이름붙이기는 그렇지만, 우리 정부의 정리된 생각입니다. 본국과 충분히 협의를 하시고 이틀 뒤 뉴욕에서 만났을 때 분명한 의사를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리근 국장은 그 봉투를 받아들어 그의 갈색 서류가방에 넣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는 의례적인 인사를 나눌 시간이다. 


    "참, 한성렬 군축평화연구소 대리소장이 다음달쯤 유엔 북한대표부로 복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뉴욕채널을 좀 보강해야죠. 오가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아지고 있는데.." 


    "오시는데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가볍게 손 인사를 한 뒤 3분여 시차를 두고 검정색 승용차에 올라 샌디에고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약 40분간의 만남은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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