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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안함, 네버엔딩 스토리 / 2010.07.14.
    북핵리포트 2007-2012 2015. 8. 17. 18:56

    나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 몇 권의 책 가운데 하나가 토마스 쿤이 쓴 [과학혁명의 구조]다. 지금은 너무 흔히 쓰이지만 '패러다임'이란 용어도 그의 책에 등장한다. 쿤은 과학사를 돌아보며 과학적 진실이 불변의 금과옥조가 아니라 단지 한 시대의 '지배적인 가설'로 존재하다가 결정적인 반증들이 등장하면 새로운 '지배적인 가설'로 대체되는 거라는 논리를 폈다. 나는 취재 현장에서 어떤 사안에 대해 접근해 갈 때 이러한 쿤의 방법론을 따르기로 했고 지금까지는 대체로 유효했던 방법이라고 자평한다.    


    지난 3월26일 밤, 천안함이 침몰했다. 처음부터 몹시 불확실한 정보들이 쏟아졌고 그 속에서 이리저리 휩쓸리지 않고 방향을 잡고 나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전술한 대로 나는 취재된 팩트를 통해 어떤 가설을 상정하고 그 가설이 옳지 않다는 결정적 반증이 등장하면 기존의 가설을 과감하게 폐기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좌초, 피로누적에 따른 전단파괴, 기뢰나 폭뢰의 폭발, 어뢰공격 이런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제시됐지만 사실 사건 초기 가장 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판단됐던 건 북한의 어뢰공격이었다. 3월 27일, 이기식 합참정보작전처장은 "북한 함정이 포착되지 않고 사고 해역에 접근할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국회에서 "기뢰 보다는 어뢰"라고 발언하는 김태영 국방장관에 대해 청와대에서 '너무 단정 짓지 말라'고 메모를 넣기도 했다.   


    그런데 군이 4월1일 공개한 지진파 관측 결과는 혼란이 거듭되던 사건발생시점이나 사고원인과 관련해 일종의 '결정적인 반증'같은 것이었다. 21시22분 경 일어난 폭발이 천안함 침몰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추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좌초나 피로파괴가 제 1 원인이었을 가능성은 이 '결정적 반증'에 의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두 번째는 인양된 천안함의 함수,함미의 상태. 내부 폭발이 있었다면 그 흔적이 남았어야 하지만 멀쩡한 상태였던 전선피복 등으로 미뤄 볼 때 내부 폭발 보다는 외부에서 폭발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마지막으로 군이 5월15일에 건져 올렸다고 밝힌 어뢰 추진체. 군은 20일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 발표 때 이 어뢰 추진체를 공개하고 어뢰에 붙어있는 알루미늄 산화물질이 천안함에서도 동일하게 붙어있다고 밝혔다. 이는 폭발의 원인이 기뢰나 폭뢰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배제하는 계기가 됐다.  


    더 나아가 나는 이 3가지 요소는 상식적인 판단으로 볼 때 ‘큰 틀에서의 조작’이 불가능한 증거들이라고 봤다. 없는 지진파를 있는 것으로 꾸미거나, 시계가 거의 0에 가까운 바다 속에서 절단면의 상태를 변형하려고 시도했다거나, 이번 사건과 관계없는 어뢰 추진체를 사고 해역에 빠뜨렸다가 인양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건 합리적인 의심의 영역을 벗어난다고 판단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지난 9일 채택한 의장성명은 어떤 측면에선 천안함 침몰 원인과 관련한 수많은 논란들에 대해 마침표를 찍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의장성명은 중국이 끝까지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진 공격(attack)이라는 용어가 들어간 채로 만장일치로 채택됐기 때문이다. 천안함이 좌초나 내부 문제 등으로 사고가 난 것이 아니라 누구인지 모르지만 어떤 주체에 의해서 공격당해 침몰한 거라는 결론이 중국과 러시아가 동의한 상황에서 내려진 것이기 때문에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는 않다.  


    그런데 침몰 100일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천안함 사건이 국내에서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있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 때문일까?  


    6월2일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 있었던 천안함 합동조사결과 발표. 발표 자체는 내가 겪었던 지난 15년간의 기자생활을 돌이켜 볼 때, 가장 세련되고 인상적인 기자회견이었다고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검은 천으로 가려있던 어뢰 추진체가 설명 도중에 공개되고 실물 크기의 북한 어뢰 설계도가 등장했으며, 조사에 참여했다는 외국 전문가들이 배석했고, 합동조사단장을 맡은 소재 전문가가 이른바 ‘흡착물질’이나 부식상태를 설명했으며, 사고당시 선체의 변형을 설명하기 위해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동원됐다.  


    그런데 나는 이 20일의 발표가 역설적으로 천안함 사건에 대처하는 우리 군, 정부당국의 문제점의 핵심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현장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논란을 낳았던 이른바 ‘1번 어뢰’는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발표 5일 전인 5월15일에 쌍끌이 어선에 의해 인양됐다. 조사결과 발표날짜는 그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군 당국은 만약 이 어뢰 추진체가 ‘결정적인 증거’가 될 거라고 판단했다면 발표날짜를 몇일 연기해서라도 제대로 조사를 하고 여러 번 확인을 거쳤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발표는 예정된 날짜에 강행됐다. 발표 당시엔 그럴 듯 했지만 이후 하나 둘 ‘결정적인 증거’라고 군 당국이 밝혔던 내용들과 관련해 매우 결정적인 문제점 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똑같지 않느냐”며 매우 강조했던 그 실물크기의 설계도는 그 어뢰 추진체와 관계없는 다른 어뢰의 설계도면으로 드러났다. 또 알루미늄 산화물질의 성분시험과 관련해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해외 전문가들로부터 제기됐고 이런 논쟁은 권위있는 과학잡지 ‘네이처’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황우석 논문조작 사건 때 뜨겁게 달아올랐던 젊은 과학자들의 인터넷 공간 브릭 게시판에서 최근 이 산화물질과 관련한 뜨거운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푸른 매직으로 씌여진 ‘1번’이라는 글자의 성분 등과 관련해서도 발표 전까지 합조단에서 정밀한 조사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결정적인 증거라고 제시한 어뢰 추진체에 관해 이처럼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당국은 처음에 부인하다가 실수든 고의든 결국 잘못을 인정하고 변명하면 또다시 의문이 제기되는 악순환구조. 이건 앞서 천안함 침몰사건 발생시간과 관련한 논란에서도, TOD 동영상의 존재와 관련해서도 아주 똑 같이 나타났던 현상이었다.  


    의심이 더 큰 의심을 낳게 하는 악순환에 덧붙여 더 심각한 문제는 합리적인 의문에 대해 군 당국이나 정부가 취한 태도다. 의심을 갖는 사람은 모두 친북세력, 자기들은 절대로 달라질 수 없는 진실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결국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스스로 허무하게 무너져버리는 일이 반복됐다.  


    마지막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저들은 어떤 거짓말이라도 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들이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군 당국의 뻔뻔함이다. 사건 초기 군 당국은 여러 차례 천안함이 잠수함이나 어뢰의 기동을 충분히 포착할 수 있다고 설명했었지만 나중에는 천안함에 달려있는 ‘소나’가 원천적으로 어뢰를 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털어놨다. 군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잠수함이 침투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면 어뢰공격에 완전히 깜깜할 수밖에 없는 천안함은 아무런 방어수단도 없이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도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한 침몰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지금까지 바라본 군의 여러 가지 행태에 비춰, 역으로 ‘스스로 정교하게 뭔가를 조작할 능력은 과연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석에서 만난 군 당국의 고위 관계자, 그리고 다른 외교안보부처의 고위 관계자도 비슷한 취지로 나에게 얘기했다.  


    그러나 내가 현재 이런 판단을 ‘지배적인 가설’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천안함의 침몰 원인과 관련해 모든 의심이 깨끗하게 가셨다는 뜻은 아니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군은 다른 여러 가지 방증에도 불구하고 왜 21:15분에 ‘최초상황’이 발생했다고 판단했고, 그런 문건을 만들었는지 천안함 사건 초기부터 여러 계통으로 여러 방법으로 답을 듣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느 누구도 속 시원하게 설명하는 사람이 없었다.  


    또 최근 일을 거론하자면 지난 주 언론노조 등 언론 3개 단체가 제기한 바 있는 천안함 스크루의 휜 방향에 대한 문제제기, 프로펠러에 남아있는 규칙적인 상처에 대한 의문에 대해 MBC는 천안함 합동조사단에 자료를 직접 제공하고 답변을 듣고자 했지만 아직까지 답을 하지 않고 있다.  


    첨언하자면 이 두 가지 질문은 러시아 조사단이 천안함 침몰 원인이 외부폭발은 맞지만 북한의 어뢰 공격이 아닐 거라는 결론을 내릴 때 내세웠던 몇 가지 논거 가운데 포함된 내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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